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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역사에서 사라진 ‘갑진왜란’… 41년 최장기 항전의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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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의 역사는 다섯 단계로 나뉜다. 창건-혼란-안정-위기-국민전쟁 시기로 세분해 볼 수 있다. 

1894년 갑오왜란, 1904년 갑진왜란
근대사의 결정적 두 전쟁 누락

일제의 ‘평화적 합방’ 꾸미기 전략
한국 학계도 일제의 왜곡 반복

‘국군+민군’ 치열한 국민전쟁 전개
1907~11년 일제 통계만 봐도
국민군 병력 14만 명, 2만 명 전사
그럼에도 ‘한말 의병 투쟁’ 축소

 
제1기 창건기는 1898년 3~7월께 독립협회의 변란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포괄한다. 갑오왜란(1894. 7. 23) 이후 경복궁 내 포로 상태였던 고종이 아관망명(1896. 2. 11)을 통해 극적으로 왕권을 회복하여 칭제건원운동을 거쳐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대외적으로 승인을 받았던 시기다. 

 

제2기 혼란기는 독립신문·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반러·친일 변란으로 대한제국의 존립이 도전받고 왕권이 탈취당할 뻔한 시기다. 1898년 3~7월부터 12월까지 최장 10개월의 기간이다.
 
제3기 안정기는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친일 변란을 진압한 1899년 초부터 1903년 12월까지 5년간이다. 3만 명 규모의 신식 군대 육성, 전차·철도·전신·전화 등 교통·통신 체계의 완비, 근대적 회사 설립 장려 정책 등 ‘광무개혁’이 이때 본격 추진됐다.
 
제3기까지를 지난 기사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제4기와 5기를 돌아볼 차례다.
 
제4기는 국가 위기로, 일제가 1904년(갑진년) 2월 6일 재침해 한반도 전역을 군사적으로 다시 점령한 시기다. 이는 ‘갑진재란’ 또는 ‘갑진왜란’으로 불려야 마땅함에도 우리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1894년의 갑오왜란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똑같은 일이 10년 만에 다시 반복됐다. 1894년의 갑오왜란·청일전쟁, 1904년의 갑진왜란·러일전쟁의 발발은 쌍둥이처럼 그 구조가 닮았다. 둘 다 한국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일제에 의해 기획되고 은폐된 전쟁이다. 조선은 갑오왜란으로 멸망했고, 대한제국은 갑진왜란으로 멸망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 두 차례의 왜란을 복원해야 대한제국이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극악한 ‘군사 정복’으로 멸망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7~27쪽).
 
갑진왜란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관통하는 장기 전쟁을 거쳐 1945년 종결됐다. 우리 민족은 고려 삼별초의 37년간 ‘항몽(抗蒙) 전쟁’보다 더 긴 41년 장기 항전을 전개했다. 갑오왜란부터 치면 51년간 하루도 쉴 새 없이 싸운 항일전쟁이다(최덕규 해제,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85쪽).
 
일본 군사사(軍事史) 전문가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는 갑진왜란을 ‘조선병합전쟁’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으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병합은 격심한 민족적 저항에 직면해 4년에 걸친 군사행동을 수반하게 되었다. 평화적으로 합병이 이뤄졌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이 식민지전쟁은 비밀에 부쳐져 그 군사작전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도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식민지화를 위한 전쟁이었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日本軍事史)』 163쪽)
 
후지와라는 일본인일지라도 ‘한국병합전쟁’ 또는 ‘식민지전쟁’으로 규정하며 갑진왜란의 실상을 갈파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일제가 꾸며낸 ‘평화합방의 모양새’에 속아 이 갑진왜란의 존재를 역사책에서는 물론 의식에서조차 지워버린 상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0~31쪽). 

 

 

 

러일전쟁도 갑진왜란 연장선에서 파악 

일제는 갑진왜란 이틀 후인 2월 8일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는데, 이 러일전쟁도 이제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파악돼야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전시(戰時) 중립’을 선언한 상태에서 기습 침략을 감행한 사실도 놓쳐선 안 된다.
 
당초 고종은 영구중립화를 추진했다. 1900년 8월 조병식을 일본 공사로 보내 대한제국의 영구중립화를 타진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0. 8. 20). 러시아는 고종의 이 중립국안을 지지하고 1901년 7월 한반도에서 일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러·미·일 공동 보호하의 영구중립으로 만드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9. 20).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점유하려는 일제는 중립국안을 거부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10. 10).
 
고종은 1903년 8월까지 영구중립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까닭에 러일전쟁은 한국의 영구중립화를 추구하는 한국·러시아와 이를 반대하는 일본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47쪽).
 
러일전쟁의 소문이 매일 떠돌던 1903년 중반을 넘기면서 고종은 방침을 수정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전시 중립 선언’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로선 최선의 방안이었다.
 
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내심 고종은 러시아가 이기길 바랐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래야 했고, 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러시아가 ‘전시 중립’이란 말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1903년 8월 15일자로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러 우호와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러 연합항전을 제안했다(홍웅호 편역, 『러시아문서 번역집(Ⅳ)』 62~63쪽, ‘대한제국 황제가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서신’).
 
러시아군이 고종의 기대대로 대한제국의 영토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면, 고종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규군과 비정규군(의병)을 총동원해 러시아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만주와 여순 안에 진을 친 채 전쟁을 소극적으로 풀어 갔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한제국의 군사 역량을 보존해야만 했다. 러시아가 패한다면, 고종과 대한제국은 청국과 러시아를 차례로 이긴 일본군과 홀로 사생결단의 항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됐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2쪽).
 
고종의 전시 중립 선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적개심을 증폭시켜 항일 투쟁력을 배가시켰다. 소위 아세아주의(동양주의 혹은 동양평화론)에 속아 일본에 우호적인 한국인들까지도 중립 선언을 침해한 일본군의 무차별 한국 점령에 대해 공분하기 시작했다. 또 러시아에는 실익을, 일제에는 큰 손실을 입혔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 협상에 국제법적 구속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때 패전국 러시아가 이례적으로 전쟁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은 일본이 중립 선언 상태의 대한제국을 침입한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력은 1904년 당시 세계 4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일제의 군사력은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국군 총 병력 3만여 명은 중립국을 유지하는 병력으로는 작은 숫자가 아니며 더욱이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으로 일제에 연합항전을 전개하는 데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는 1904년 4월 14일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불을 질러 고종의 분시(焚弑)까지 기도했다. 경운궁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탈 정도의 대화재였다. 다행히 고종은 황실도서관으로 쓰던 수옥헌(현재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이 화재가 방화임을 알았지만 철저히 모르는 체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가 눈치챈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확히 일제의 방화임을 알린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44쪽).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는 이 같은 사실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왜변’이라 명명해야 하듯이 일제의 고종 분시 기도 역시 ‘갑진왜변’으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 국군이 본격 대일 항전에 나선 것은 을사늑약(1905. 11. 17) 이후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하는 가운데 최대한 경거망동을 자제시키며 보존해 온 국군과 민군을 총동원하여 ‘국군·민군’ 일체의 전면 항쟁, 즉 국민전쟁을 개시한다(한용원,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 90~91쪽).
 
1905년 12월부터 고종은 거의밀지를 전국적으로 다시 하달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도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어났다. 고종을 정점으로 국군과 민군이 독립을 위해 하나의 의군으로 합쳐진 ‘국민군’은 ‘대한독립의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운궁은 국내외 항일 독립전쟁의 지휘소였다.
 
갑진왜란을 빼놓은 기존의 역사책들은 갑진왜란에 대항에 전개한 처절했던 국민전쟁을 소위 ‘구한말 의병 투쟁’이라며 축소해 놓았다.
 
일본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4년간 국민군이 치른 전투는 총 2852회, 국민군의 병력은 총 14만1815명에 달한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 164쪽). 그때까지 국민군 전사자는 일제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더라도 무려 1만7840명에 달했다(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167쪽, 표3-7).
 
국민군은 전국적 항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일제의 강제 병탄을 계속 지연시켰다. 일제 통감부는 한때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아야 하는 궁지로 내몰렸고, 그런 책임을 묻는 비난에 밀려 이토는 통감직에서 해임됐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에 대한 ‘폭로 전쟁’도 병행했다. 고종이 1904년 극비리에 영국인 기자 출신 베델을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항일 폭로·홍보 전쟁을 벌였던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실무를 맡은 인물이 고종의 신뢰를 받던 궁내부 예식원 회계과장 백시용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까지 반일 의병전쟁의 피어린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국내외에 알렸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211~213쪽).  
     

 

미·일 갈등, 러·일 접근 속 이토 처단 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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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1907년의 헤이그회의, 즉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 6. 15~10. 18)에 황제의 특사단을 파견해 을사조약이 늑약임을 폭로한 외교전은 비교적 알려져 있다. 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유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다. 그러나 한국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고종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다. 고종은 여전히 밀명을 내리고 의군을 조직하며 국민전쟁을 지휘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라는 고종의 밀명이 대한독립의군 총장 이범윤을 통해 당대 최고의 명사수이자 충군애국심의 신(新)존왕주의에 투철한 안중근에게 내려갔던 것이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42~399쪽).

 
1906년부터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이전과 정반대로 뒤집혔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한국을 배신하고 일제를 지지했던 미국이 일본과 갈등에 빠지며 전쟁을 벌이려고까지 했고, 그러자 러시아와 일본이 접근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일 갈등이 심화될수록 일제는 러시아로 기울었고, 러일전쟁 패전과 1905년 이래 사회주의 혁명 열기로 인해 국내적으로 약화된 러시아가 일본의 접근을 받아들이면서 러·일 접근이 가시화되었다.
 
고종은 대책을 찾기 어려운 이 모순된 국제 정세의 흐름과 고투를 벌였다. 미·일 갈등은 한국의 독립 회복에 이로운 정세를 조성해 주지만, 제2차 러·일협약을 위한 러·일 접근은 일제에 한국 병탄의 길을 열어줄 공산이 큰 점에서 대한제국의 존속에 매우 해로운 정세 흐름이었다.
 
급속한 러·일 접근 추세에 고종이 내놓은 대응책 중 하나는 일본 내 러·일 협상파의 우두머리 이토를 러시아령 안에서 처단함으로써 러·일 외교 관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이와 연관된 거사였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37~342쪽).
 
고종 폐위 직후 일제는 한국군 해산까지 밀어붙였다. 대한제국 국군과 민군의 연합 항전인 국민전쟁은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일제히 본격화되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혈전을 전개했다. 고종이 만든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감시를 의식하면서도 가능한 한 그 전쟁 일지를 기록해 놓으려고 했다. 전국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지방을 거의 ‘해방구’로 만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탄약과 무기의 부족으로 점차 북상해 만주와 연해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런 까닭에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자신이 초안하고 1940년 9월 17일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공동 명의로 발표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에서 대한제국군의 강제 해산과 동시에 시작된 대한국군의 서울 전투 개전일인 1907년 8월 1일을 광복군의 창립일로 선언했던 것이다. “국방군과 의병이 서로 힘을 합쳐 가는 곳마다 적을 휩쓸어 버리니 그 명성과 위세가 큰 파도처럼 호호탕탕했다.…요컨대 한국 광복군은 일찍이 1907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과 동시에 성립한 것이다.”(조소앙,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 1940년)   

 


자문 전문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참고자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황태연·청계·2017), 『日本軍事史』(후지와라 아키라·서영식 역·제이앤씨·2013), ‘고종 황제와 안중군의 하얼빈 의거’(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2014),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 황제’(이태진·『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지식산업사·2011),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 요약』(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러시아문서 번역집(Ⅳ)』(홍웅호 편역·선인·2011),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홍순권·서울대출판부·1994), 『고종황제와 한말 의병』(오영섭·선인·2007),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한용원·오름·2014),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1940)(조소앙·삼균학회 편·『조소앙선생문집(상)』·횃불사·1979)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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