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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조선왕조 추존황제 친향은 이렇게...문조익황제 183주기 거행

2013-04-24

[문화기획]조선왕조 추존황제 친향은 이렇게...문조익황제 183주기 거행

신정익황후 123주기와 함께 봉행...상징적 왕인 황사손 초헌관으로 참여


한철수위원

기사입력 2013-04-24 [18:22]


[구리=경기인터넷뉴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동구릉 경내 수릉(綏陵)에서는 지난 4월 20일 조선조 제24대 헌종의 생부이며, 고종의 양부였던 문조익황제(문조)와 신정익황후(신정왕후) 조씨의 183주기와 123주기 기신친향례를 대한예전 방식으로 거행했다.


이 제향은 수릉봉향회(종약원 동대문분원)에서 주관을 했으며, 왕손과 부원군 풍양 조씨 문중 등 500여명이 참반을 했다. 이번 제향을 통해 조선왕릉 친향례의 의미를 살펴본다.(글쓴이 주)



-조선왕릉 제향은 친향과 섭향으로 나뉘어...아헌관은 부원군에서 맡아


조선시대의 왕릉의 제사인 제향(祭享)은 기신제(忌辰祭)라고도 하며, 왕이 직접 참례하는 친향(親享)와 그렇지 않은 섭향(攝享)으로 나뉜다.



▲ 제1대 황사손 이구(사진제공: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왕릉은 남북한에 42기가 있다.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와 2대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이 북한 개성에 있다.

 

이 둘을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릉의 제향은 조선조 역대 왕과 왕자의 후손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종약원)이 봉향회(奉享會)을 결성하여 삼헌관과 제관을 담당한다.

 

삼헌관 중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은 왕비 친정인 부원군의 후손이 담당한다. 

 

조선시대 사직과 종묘, 환구단 등 국가적인 제의에는 국왕이 직접참여 했으며, 현대에는 태조의 건원릉, 고종의 홍릉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은 섭향례에 따른다. 


황사손의 직계인 영(친)왕의 영원(英園), 1대 황사손 이구의 회인원(懷仁園)도 친향으로 지낸다. 문조의 경우 이날 처음으로 거행했기에 그 의미가 크다. 


-왜 문조익황제인가...대한제국 황제는 10명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과 더불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식으로 사용 한다. 


1899년 12월 태조를 고(高)황제로, 양부인 익종을 문조로 바꾸고 문조익(翼)황제로, 조부인 순조를 순조숙(肅)황제로, 증조부인 정종을 정조선(宣)황제로, 장종(사도세자)를 장조의(懿)황제로 올렸다. 


1908년 5월 순종은 진종(효장세자)을 소(昭)황제로, 헌종을 성(成)황제로, 철종을 장(章)황제로 각각 올려 8명의 추존황제와 살아서 황제를 지낸 고종태(太)황제, 순종효(孝)황제와 함께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추존황제 8명 중 3명의 황제인 진종, 장조, 문조는 효장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 혹은 정치적인 희생을 당했으나, 왕에서 황제가 되는 신기원을 세웠다. 

23대 순조(純祖)가 승하(昇遐. 왕의 죽음을 말함. 1834)하자 손자인 헌종은 묘호를 순종(純宗)으로 부르다가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바꾸었다. 

진종(眞宗)은 영조의 장남이다. 영조가 손자인 정조의 편안한 정치행로를 위해 문제가 많은 사도세자의 아들보다는 어려서 요절한 맑은 영혼을 지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왕의 유지에 따라 큰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했다. 

장조(莊祖)는 사도세자(후에 장헌세자)로 광무 3년(1899) 9월 1일 장종(莊宗)의 묘호로 왕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장조로 바꿨다. 


-조선왕릉 제향의 상징적인 왕은 황사손...친향례의 주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이 문을 연지 13년 만에 문을 닫았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518년 만에 ‘신라-고려-조선’을 잇던 제왕의 나라는 사라졌다. 

그로부터 103년 지났으나 조선왕릉에서는 유교(성리학)식 제향을 지낸다. 이 모습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한 큰 요인이었다.


이 제향에는 왕을 대행하는 상징적인 존재인 황사손(皇嗣孫)이 있다. 황사손은 국조오례의나 각종 예서에 따라 4대의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이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왕(황제)이 초헌관으로 제의 주체가 되며, 황사손이 참여하는 제향을 친향으로 삼고 있다.


제1대 황사손은 이구(李玖. 1931~2005)이다. 그는 고종의 손자로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英王. 의민황태자) 이은(李垠)의 아들로 7년 전 서거하자, 제2대 황사손으로 이원(李源)이 그 소임을 맡고 있다.



제2대 황사손 이원은 대한제국 제1대 고종황제의 다섯째 황자 의왕(의친왕)의 9남 이갑(李鉀, 이충길)의 장남으로 고종의 증손자이며, 문조의 고손자(선원보: 문조-고종-영왕-이구-이원)가 된다. 

현재 태조의 건원릉, 고종의 홍릉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의 제향은 섭향이며, 이날 지낸 문조의 제향은 현대에 들어 처음으로 친향으로 거행했다.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는 누구인가

183주기를 맞은 문조익황제는 조선조 제22대 순종과 순원왕후의 장자로 순조 9년(1809)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고, 4세에 왕세자가 되고, 1817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순조 19년(1819) 조만영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며, 안동 김씨의 70년간 지속한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과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는 등 개혁의 불을 댕겼으나, 1830년 5월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22세에 요절했다. 순조는 그를 효명세자라 했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자 추존왕 익종(翼宗)이 되었고, 그의 양자인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 후 2년 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올린다. 


효명세자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316편에 달하는 한글로 쓴 시가집인 학석집(鶴石集)이 있으며, 할머니 순원왕후의 회갑잔치를 위해 춘앵무를 직접 안무하는 등 그가 왕좌에 있었다면 세종과 정조의 뒤를 잇는 제3의 르네상스를 이뤘을 것이라는 평도 자자하다.


신정익황후는 아버지는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이며,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인 목사 시연(時淵)의 딸로 순조 8년(1808)에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조대비로 더 유명하다.



12세에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됐고, 순조 27년(1827) 헌종을 낳았고,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가 된다. 철종 8년(1857)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철종도 헌종과 마찬가지로 후사 없이 죽자 왕후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 왕실의 모든 권력을 손안 넣게 된다. 70년간 세도정치를 폈던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또는 재황. 고종)을 아들로 삼고 철종의 후사가 아닌 익종의 뒤를 잇게 해 왕통을 이어갔다. 

왕후는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했다. 고종 27년(1890) 83세에 승하하니, 조선시대 역대 왕비 중 가장 오래 살았으며, 내명부를 72년간 지킨 진기록을 남겼다.

신정왕후는 태종의 원경왕후, 세조의 정희왕후,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와 함께 조선조 왕후 5걸로 꼽는다.


-수릉 두 차례 옮겨 동구릉으로...합장릉, 금관조복 문인석이 특징


효명세자가 순조 30년(18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를 지내고 연경묘라 했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했다.


헌종 13년(1846)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나와 이해 윤5월에 양주(중랑구) 용마산 아래로 옮겼고, 철종 6년(1855)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지금의 위치에 다시 옮겨 지금의 동구릉이란 이름을 부르게 했다.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해 마치 한 사람이 누워있는 단릉 같지만, 문조와 신정왕후의 합장릉이다.



이전의 왕릉은 “국조오례의” 범례에 따라 조성을 해 봉분 앞을 초, 중, 하계 3단으로 나눴고, 초계에 봉분과 혼유석이, 중계에 문석인과 장명등이, 하계에 무석인이 배치했으며, 수릉은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공간에 두었는데, 이는 영조 때 발간한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조영했기 때문이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을 입혔고, 얼굴이 길고 눈과 입술은 가는 선으로 세밀하면서도 친근하게 표현했으며, 어깨는 움츠리고, 얼굴은 턱을 목 쪽으로 당긴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으로 미술학적 가치가 높다.


-문조익황제 183주기 어떻게 지냈나


이번 수릉기신제는 문조와 신정왕후를 함께 지내는 합설(合設)의식을 따랐으며, 친향의식에 걸맞게 초헌관 황사손 이원, 아헌관 부원군 조경구(풍양조씨 한산군파회장), 종헌관 이주관(인릉봉양회장)이 봉임을 했다.


제의 순서는“예능소(수릉으로 감)-전향례(제의에 사용할 향과 축을 전함)-알릉례(황사손이 수릉에 도착했음을 알림)-제집사각취위(제관들이 봉임 할 자리로 감)- 황사손입소차(황사손이 막차에 들어감)-행초헌례(황사손이 잔을 올림. 삼상향_집작헌작_독축)-행아헌례(부원군 후손이 두 번째 잔을 올림)-행종헌례(세 번째 잔을 놀림)-행사신례(황사손이 문조의 혼을 떠나보냄)-행망료(축문을 태움)-예필-환궁”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수릉친향례에 황사손은 익선관 참복을 입었으며, 이전에는 검은색을 띤 파란색에 양어깨와 배와 등에 용을 새긴 참복(곤룡포)이었으나, 대한예전과 고종과 순종의 국장 때 맞상주인 순종과 영양의 제의복 방식에 따라 옥색을 띤 참복으로 갈아입었다. 신발도 검정색 흑예화에서 백예화로 바꾸었다. 제관은 오사모에 천담복을 입었다.



동계를 통해 정자각(제각)을 오르내리는 방식도 어층계(어계)와 동문은 황사손만 사용하며, 제집사는 임시로 설치한 보층계인 제신목계로 오르내리고, 서문으로 출입한다. 


또한, 국조오례의에는 왕이 정자각에 올라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절을 했으나, 대한예전 의례에 따라 신문앞 정면에서 절을 한다.


섭향례에는 삼헌관을 포함한 16명의 제집사가 필요하나 친향례에는 황사손을 제외한 5명의 제관이 늘어난다.


이날 황사손을 인도한 찬례는 이상훈. 제의를 순서가 담긴 홀기해설을 한 집례 이희천. 제의를 감독하는 감찰 이하중. 축문을 읽는 대축은 이정수가 봉임을 했다.


황사손의 신변을 보호하는 우장례 이상주, 좌장례 이학주. 초헌례 중 정자각에 올라 황사손 가까이에 있는 우근시 이병천, 좌근시 이천재가 소임을 맡았다.


신위전에 올리기 전 잔과 음식을 관장하는 내축사 이준재, 외축사 이기정. 신위전에 잔과 음식을 올리는 내재랑 이용재, 외재랑 이형종. 제주를 따르는 집준관 이용태가 역할을 했다.




제물과 제수를 담당하는 전사관 이현창. 왕릉의 제향을 담당하는 능사 이강수. 집례가 홀을 읽어 나갈 때 제집사와 참반원에게 구령하는 찬자 이규상이 담당했다.


아헌관과 종헌관을 인도하는 알자 이규식. 제집사를 인도하는 찬인 이경용. 왕릉제향을 과정을 현대식으로 설명하는 해설에 이병학. 황사손의 행차에 그늘을 만드는 일산은 이주섭, 양산은 이관주와 이우성이 맡았다. <사진: 한철수 위원>



http://m.ginnews.kr/a.html?uid=6417


[참조문헌: 조선왕조실록(태백산본),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인터넷판), 조선왕릉제향(전주이씨대동종약원. 2013), 구리시의 역사와 문화(구지옛생활연구소.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