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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타임즈 역사기획칼럼(5)] 대한제국 13년…⑤ 을사늑약에 대한 분노

2017-03-25

[한국타임즈 최창수 기자] '정담은 출판사' 탄생을 기념해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칼럼을 6회 역사기획물로 담아내고 있다. 5번째 이야기는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였지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항쟁했던 민족의 분노를 담고 있다. 무너져버린 대한민국을 곧추 세우고 싶은 일념에서다.


1. 일본의 침략본색은 노골적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노골적으로 침략본색을 드러내고 대한제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처럼 불안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대한제국 정부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나라의 운명을 뒤흔드는 열강들의 세력다툼, 그 거센 폭풍우 속에서 대한제국이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러일전쟁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한반도 공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맞선 러시아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한다. 러일 양국의 팽팽한 전운이 감돌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더욱 긴박하게 흘러갔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대한제국일 수밖에 없었다. 고종 황제 앞에는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놓여 있었다.

 

2. 대한제국, 전시중립국 선언했지만

 

1903년 8월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냈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러시아와 대한제국이 동맹을 맺어 일본에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미국에도 러일전쟁을 막아달라는 친서를 보냈지만 답변을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고종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전시 중립국 선언이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04년 1월에 대한제국은 열강들을 향해 중립국을 선언한다. 그러나 열강 중 그 어느 나라도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끝내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만다.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를 인정했고, 미국 역시 '카스라-태프트조약'으로 아시아에서의 이권을 일본과 함께 하는 상태였다.

 

3. 을사늑약은 농단이었다 

 

전쟁은 불과 3개월 만에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고, 영미와 손을 잡은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 침략에 나선다.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켜 군사강점 상태를 만들고, 보호국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하나씩 강탈한다. 1905년 11월, 고종의 승인 없이 5명의 대신들만 참석한 가운데 외교권과 내정간섭을 획책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정식 조약이 될 수 없는 문서였다. 고종이 끝내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열강 9개국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냈지만 외면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1907년 봄날, 고종의 집무실이자 비밀접견실로 사용된 중명전 지하에서 고종 황제는 세 명의 친숙한 신하를 만난다.

 

4. 대한제국 황제 밀사 – 이위종, 이상설, 이준

 

고종은 이들에게 친서를 전달한다. 친서에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판단해 철수한 세계열강들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위종, 이상설, 이준. 당시 고종이 만난 이들은 특사 자격으로 세계만국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된다. 일본의 국가침탈에 저항하는 최후의 국권수호 방법이었다.


헤이그로 가는 길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3인의 특사는 용정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다. 한성을 출발한 지 35일 만의 일이었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는 전 세계 45국이 모이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헤이그 시내 아담한 2층 건물에 특사들은 자리 잡는다. (계속 이어집니다)


[최창수 한국타임즈 수도권취재본부 총괄본부장은 '한국기독교 사형폐지운동연합회 수석운영위원' '뉴스나비 논설위원' '한글사랑방 운영위원' '민생안정실천본부 홍보위원장' 도서출판 '정담은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타임즈 최창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