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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의친왕부-사동궁(義親王府-寺洞宮)

사동궁(寺洞宮)은 대한제국 고종광무태황제의 5남이었던 이 강 의친왕의 사저이자 1906년 설치된 의친왕부(義親王府)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었던 궁으로 양옥 1동과 한옥 수십동으로 구성됐었습니다.

<사동궁문양. 이 문양은 천도교찬송가에도 쓰였습니다.
이는 천도교 손병희와 의친왕께서 함께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1910년 한일병탄조약 체결 후에 이 강 의친왕께서 일본정부가 대한제국황실의 방계혈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인 공족으로 분류되어 공의 지위를 받으면서 의친왕부 사동궁은 ‘이강공저’(公邸)로 불리게 됐습니다.

<의친왕부가 설치된 사동궁은 이사관급의 총판과
관원 6명 부속직원 40여 명이 있던 번듯한 관청이었습니다.>

이 강 의친왕 전하께서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실패하였던 대동단사건의 영향으로 1930년에 강제로 은거하게 되셨고 장남 이건왕자가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습니다.

<고종황제 붕어 후 사동궁에서 촬영된 상복차림의 의친왕비와 이건왕자. 출처-해원왕녀>

의친왕의 사동궁은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따르면 관훈동 196번지 일대 대지 총 7,880㎡에 달했고 1906년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설치된 별궁으로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의 본거지며 성지였습니다(Cf. 고종실록 1906년 7월 22일; “민철훈을 의친왕부 총판에 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3-10-12).

<사동궁 지밀 안방에서의 의친왕비. 의친왕께서 대동단망명사건 이후 연금되셨을 때 일본헌병들이
이 방 장지문에 조그만 유리창을 내고 수시로 방안을 감시했다 합니다. 사진 및 자료출처-이해경『나의 아버지 의친왕』, 252>

뿐만 아니라 조선기원의 본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이 와해 위기에 있을 때 의친왕께서는 사위 이학진(李鶴鎭)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동궁 사랑채 15칸을 내어주어 조선기원으로 자리 잡도록 허락하셨습니다(Cf. 한송희, “<부음>한국 바둑계의 큰 별 이학진 옹 타계,” 『엑스포츠뉴스』, 2009-11-16; 이청, “[사동궁 기원] 근대와 현대 그리고 바둑-2,”『ORO세계인터넷바둑의 허브』, 2013-02-20).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대한제국황실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하기 위해 1945년 9월 23일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했습니다. 과거 이왕직에서 관리했던 황실재산들은 모두 국유화 했고 사동궁이나 성락원같이 존치할 필요가 없는 재산들은 매각·대여하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매각의 대상이 된 사동궁은 결국 이승만정권에 의해 강탈되어 점차 축소됐고 1947년 민간에 불하됐습니다.

의친왕 개인의 부채를 갚기 위해 매각했다는 설도 있지만 주변 권력자들이 의친왕을 겁박해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다는 사실을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친왕의 5녀인 해경왕녀는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당시 의친왕이 공갈협박으로 사동궁을 헐값으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는 “이승만 박사의 정부가 수립되면 사동궁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팔아 버리십시오”라고 부추기는 협잡배들의 농간에 넘어가셔서 사동궁을 헐값에 방매하시고 말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안국동에 있는 별궁으로 이사하시게 되었다 (Cf.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124).

1947년 4월2일자 『한성일보』에는 “사기에 걸린 이강공”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융희황제의 동생인 의친왕 이강이 해방과 더불어 일충근신 은거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의 소유재산이 적산취급 올 당한다하여 당시의 시가로 천수백만 원이나 되는 것을 감언이설로 꾀어 사백만원에 팔아준 다하고 현금은 약 일백오십만 원 가량밖에 안주고 사기횡령을 당하였다하여 이응내 외 1명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하였는데 작일 담당검찰과 강석복씨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하였다는 내용이 보도되어 의친왕이 사동궁 매각에 관련하여 억울하게 강탈되듯 빼앗겼다는 해경공주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1947년 4월2일자 『한성일보』에 보도된 사동궁 매각관련 ‘사기에 걸린 이강공’이란 제목의 기사>

아래의 1948년 9월14일자 『대한일보』의 “義親王宮은 어대로, 謀利輩의 私有?國有?, 無慘!建築地로 伐採된 王宮古木”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의친왕의 사동궁이 모리배의 농간과 협박으로 강탈당됐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 관훈동의 의친왕궁은 해방이 되자 청파동에 사는 박모가 의친왕 이강에게 매도를 강요하자 이강은 할 수 없이 시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불과 이백만 원에 박에게 매도했다.

이런 일이 생긴 지 머지않아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실시됨과 동시에 의친왕궁은 국가적인 재산인바 부정 매매함은 부당하다 하여 대법원장에게 통고하여 도로 이왕직에게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당시 대법원에서는 이를 묵살하여 이강씨는 그제야 비로소 공산주의자들에게 몰수당하지 않음을 알고 이는 박모의 자기적 수단이라 하여 고소하였는데 이강씨 담당변호사 모씨는 이강씨의 변호는커녕 도리어 박에 부동(협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모는 이러한 고소사건이 생기기 전부터 최시화라고 하는 자와 북한에서 막대한 금액을 내약하고 최와 함께 결탁하여 이강씨의 변호사를 전위로(앞세워) 이강씨에게 공갈협박으로 고소취하를 강요하자 이강씨는 자기의 명예 상 만강의 눈물을 머금고 고소를 취소하게 되어 박은 드디어 최에게 의친왕궁을 매도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의친왕궁은 일개 모리배의 손에 들어가게 됐다.

<모리배의 농간과 공갈협박으로 의친왕의 사동궁이 강탈당했다고 보도한 1948년 9월14일자 『대한일보』 기사>

결국 의친왕은 친일역적매국노들의 사주를 받은 시정잡배들의 공갈협박으로 사동궁을 헐값에 강탈당하듯 빼앗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동궁은 조계사 터에서부터 안동별궁 그리고 종각역 주변까지 전체규모 만평에 건평 2800여 평이 넘던 대규모 궁지였습니다. 당시 시가 3500만 원이 넘었는데 단돈 120만원도 안 돼는 가격에 강매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석복 검사는 의친왕의 ‘사동궁매각사기사건’을 맡은 2일 뒤 인 1947년 4월 4일 “탐관오리 모리배”로 몰려 강제로 검사직을 사임하게 됐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강석복 검사의 사임을 보도한 1947년 4월4일자 『중외경제신보』기사>

<강석복 검사의 사임을 보도한 1947년 4월4일자 『한성일보』기사>

<강석복 검사의 사임을 보도한 1947년 4월4일자 『대중신보』기사>

대부분의 신문들이 강석복 검사가 어떤 경위로 사임하게 됐는지 자세히 보도하지 않았고 일괄적으로 “탐관오리모리배숙청”과 연관되어 어쩔 수 없이 사임한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의친왕의 사동궁 사기관련 사건을 맡게 된 후 이루어진 일이라 이승만에 핍박받고 있던 의친왕을 도우려는 의로운 검사를 가만두지 않았던 당시 정권의 속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정황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언론들은 강석복 검사가 탐관오리모리배가 아니며 변호사로 개업하여 인권변론에 앞장선 정의로운 법조인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강석복 검사의 변호사개업을 알리는 1949년 9월25일자 『한성일보』기사>

<인권을 변호했던 강석복 검사를 소개한 1950년 2월10일자 『한성일보』기사>

이승만은 이왕직재산이 미군정하의 적산재산으로 분류됨을 부당하다고 호소하며 창덕궁 운현궁 등의 건물사용금지를 언명하며 구황실재산의 강탈과 탈취를 노골화했습니다. 아래의 기사들은 이런 이승만의 야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왕직재산을 미군정하의 적산재산으로 분류됨이 부당하다 호소하며 창덕궁과 운현궁 등의 건물사용을 금지하는
언명을 보도한 1947년 5월22일자 『부인신보』기사[좌]와 1947년 5월23일자 『부녀일보』기사[우].
국유화라는 명목으로 이승만은 구황실재산 소유야욕과 탈취를 노골화했습니다.>

<사동궁터지도. 출처-종로구청>

이렇게 사기매각으로 빼앗긴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성지 사동궁! 지금은 흔적도 없이 멸실됐습니다. 천민자본주의에 매몰된 천박한 한국사회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전통이고 문화 보존이고 돈 앞에서는 자기 집 조상제실도 때려 부수는 천박하고 근본이 무너진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멸실된 자리에는 인사동관광홍보관과 주차장 그리고 SK빌딩이 들어서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에 관한 유형유물역사증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300년 넘은 회화나무 만이 외롭게 사동궁터를 증거하며 대형 철근콘크리트빌딩에 둘러싸여 위태롭게 서있을 뿐입니다.

<2021년 현재 사동궁 지밀 터에는 주차장이 들어서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동궁터 안쪽에 자리 잡은 인사동홍보관 안에서는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박장대소하며 사진도 찍고 차도 마십니다.>

<사동궁터 안 회화나무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표지판.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친왕 또는 사동궁 관련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왕궁에 심었던 회화나무가 사동궁터에 300년 넘게 홀로 주변
철근콘크리트빌딩에 둘러싸여 위태롭게 버티고 서있습니다.>

<사동궁터에 들어선 철근콘크리트빌딩 SK건설>

<2011년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철거되는 사동궁.
허물어지고 있는 이곳은 의친왕비의 처소였던 지밀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사진출처-뉴시스>

황실복원운동가 박관우는 위 사진에서 철거되고 있는 요정 ‘도원’전각의 위치에 대해 종로구청에 민원을 신청했는데 담당공무원은 이곳이 의친왕비의 처소인 지밀이라 답변했다 합니다. 의친왕비께서 머무르셨던 지밀이 1955년부터 ‘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수십 년 동안 사용됐다는 것도 한탄스럽지만 이곳이 원래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주차장이 됐다는 사실에 박관우는 자신의 칼럼에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습니다(박관우, “의친왕비 처소와 관련된 충격적인 사실공개: 사동궁의 일부 건물이 요정으로 되었다는 기록 발견,” 『강원경제신문』2014.01.26).

또한 사랑채는 매각되기 전 의친왕의 사위이며 초창기 한국바둑사의 산 증인인 이학진의 주선으로 조선기원이 설립된 유서 깊은 곳이었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고, 사동궁 양관은 매각 후 중앙예식장이 됐는데 원인 모를 화재가 나 소실됐고 그 자리에 종로학원이 들어선 후 1984년 현재의 SK빌딩이 들어섰고, 의친왕부 사무실은 매각 된 후 종로예식장이 됐다가 철거되어 그 자리에 대성스카이렉스빌딩이 들어선 것은 마치 환구단이 호텔로 변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왜 환구단과 사동궁 같은 황실의 핵심유적지들이 원형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천민졸부재벌들에 의해 그 터 위에 시세차익과 임대료수익을 노린 대형현대식 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 설 수밖에 없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자신의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사동궁의 파괴를 적나라하게 소개한 버거슨의 『발칙한 한국학』 표지>

포크레인으로 철거되는 사동궁 지밀의 사진은 사동궁을 살리기 위해 발로 뛰던 J.스콧 버거슨의 책 『발칙한 한국학』에도 실렸습니다. 버거슨은 책에서 한국은 "매트릭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모르페우스가 네오에게 준 조그만 붉은 알약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며 이는 "마치 네오가 붉은 알약을 먹고 눈을 뜬 것처럼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면 제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매트릭스의 세계로 통하는 플러그가 꽂힌다"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버거슨에게 한국은 "아주 이상한 곳"이며, "길거리에 나서면 매력이나 예의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차갑고 야만적인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버거슨이 지적하는 한국의 문제점들은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천박함을 매우 적나라하고 적시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알아낸 사실들은 한국인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동궁터에 자리 잡았던 '도원'이라는 요정은 2004년 9월, 노무현정부가 대한민국 전역에서 성매매를 강력하게 단속하겠다는 조치를 발표한 후 한주가 지났을 무렵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10개월여 후 갑자기 포크레인이 들이 닥쳐 눈 깜박할 사이에 궁의 흔적을 완전히 깔아뭉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주차장이 들어섰습니다.

이 건물의 주인이 의친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종로구청 문화재과에 찾아가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923년도 서울 중심부 지도에 문제의 건물이 실제로 의친왕 사동궁(궁궐의 별궁)이었음이 명시돼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어떻게 종로구청이 그런 역사적인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작 주차장 따위를 지을 수 있느냐"고 담당 공무원에게 물었습니다.

팀장과 두 직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동안 책상 위에 펼쳐놓은 커다란 지도만 들여다봤다 합니다. 여직원 한 사람이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게 영어로 대답했다합니다: "It's shame(부끄러운 일이야)." 저자는 이어 "만약에 어느 일본기업이 도원을 사들여 그 부지에 주차장을 만들겠다고 했더라면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그 건축적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을 것" 이라며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사회의 무지몽매한 천민재벌자본주의를 날카롭게 꼬집었습니다(Cf. J. 스콧 버거슨, 발칙한 한국학』 [서울: 이끌리오, 2002])

<600년 역사의 종로가 철근콘크리트빌딩으로 뒤덮여 강남화 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역설하고 있는 버거슨.
버거슨의 이런 외침에 한국인으로서 창피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정작 종로 중구의 철근콘크리트 신축 개보수
인허가권을 갖은 공무원들은 언감생심 이런 부끄러운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으로서 더욱더 낙망이 될 뿐입니다. 캡처출처-SBS>

버거슨은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순조대왕의 장녀 명온공주가 기거했던 죽동궁터에는 14층 회색 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섰는데 1층에는 맥도널드, 지하에는 미시클럽이, 예종대왕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의 사저였던 수진궁터에는 주차장과 스타벅스가 들어섰고, 600년 서민의 애환이 서린 피맛골은 속절없이 멸실되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물질만능주의적인 현실을 적시했습니다.

이렇게 종로의 강남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600년 고도 종로에는 노상 공동묘비와 같은 수백 개의 검은 대리석 문화재표지판이 설치돼 있습니다. 이제 곧 경복궁도 허물어 주상복합빌딩을 질 판입니다. 사동궁이 파괴되고 피맛골과 수진궁터 그리고 죽동궁터에 맥도날드 스타벅스건물이 설치될 때 서울시장은 이명박(2002.07.01~2006.06.30)과 오세훈(2006.07. 01~2011.08.26) 종로구청장은 김충용(2002.07.01~2010.06.30) 문화재청장은 노무현정부의 유홍준(2004. 09.03~2008.02.22)이었습니다.

<죽동궁터에 들어선 커피숍과 호텔[좌]. 수진궁터에 들어선 스타벅스[우]>

이철우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2011년 9월 20일(화) 제303회 문화재청 국정감사 시 버거슨의 저서에 기술된 사동궁 파괴관련 내용을 인용하며 우리 정부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기거했던 사동궁은 허물어 ‘주차장’을 만들어 멸실시키고 일본 병참기지는 8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하는 등 문화재 행정이 엉망이라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의원에 따르면 종로 일대에는 사동궁 수진궁 죽동궁 등 큰 궁이 3개나 있었지만 현재 모두 멸실됐고, 특히 왕족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의친왕이 기거했던 관훈동 196번지 일대 사동궁은 이승만 대통령 재임시절인 1955년 요정 ‘도원’으로 변했고, 2004년 9월 노무현정부의 성매매 단속 10개월 후 포크레인에 의해 밀려 주차장으로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Cf. 박주연, “의친왕궁은 주차장, 日장교관사는 문화재?” 뉴스시 2011-09-20; “포크레인에 밀려 허물어지는 사동궁,” 『중앙일보』 2011-09-20).

<이철우 의원이 사동궁 파괴 관련 버거슨의 저서를 인용하며 문화재청에 질의한 내용>

“독립운동까지 했던 황족이 기거하던 역사적인 궁이 요정으로 변하고 결국 쓰러져 주차장으로 변하는 동안 대한민국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지금 이 장소에는 사동궁이 존재했다는 표석하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동궁이 주차장으로 변해가는 동안 마포구 상암동에 있던 일본군 장교관사는 8억 원을 들여 이축 복원했습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우리 황족의 궁은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일제 장교들이 쓰던 병참기지는 수억 원을 들여 복원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행정의 현실이고 그야말로 얼빠진 문화재청”이라고 질타했는데 문화재청은 한마디로 어처구니없고 얼빠진 답변으로 일관했습니다. 다음은 문화재청의 답변내용입니다:

의친왕궁 등은 정비 당시 이미 원형이 일부 훼손 변형되어 지정되지 못한 비지정문화재로서 보존 관리상 한계 등 현실적인 문제로 멸실된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표석이 없는 사동궁의 경우에는 의친왕궁 터를 기념할 수 있도록 서울시와 협의하였으며 조속히 표석설치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Cf. 제303회 국회(정기회) 국정감서 서면질의답변서).

<사동궁 멸실 관련 문화재청의 요식적이며 무성의한 답변서 일부>

사동궁의 복원은 고사하더라도 문화재청이 약속한 사동궁터 표지석은 현재까지도 설치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이 훼손된 상태의 사동궁터 철판. 현재는 이 철판마저 사라진 상태입니다. 출처-두피디아>

사동궁의 역대 수장

  • ■사동궁 종주 • 제1대 :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 • 제2대 : 이건왕자(李鍵, 1909~1990)

  • ■사동궁 사손 • 제3대 : 이곤왕자(李錕, 1920~1984) • 제4대 : 이준황손(李준,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