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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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안동별궁(安洞別宮)

종로구 안국동 175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안동별궁은 1446년 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저택이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말년 이곳에서 승하하셨습니다. 1471년 연경궁으로 불리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기거했습니다.

중종대왕 때는 경빈박씨 소생 혜정옹주, 인조대왕 때는 선조대왕과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아 난 정명공주, 숙종대왕 때는 연령군의 궁가가 됐습니다. 1882년과 1906년 고종광무태황제 때는 왕세자 겸 황태자셨던 순종융희황제의 가례소가 됐었고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경복궁에서 쫓겨난 70여명의 궁녀들의 처소가 됐습니다(Cf. 강진철, “安東別宮考”[The Study on Andong Palace],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亞細亞女性硏究』 2집 [1963년 12월], 1-24; 안애영, “1882(壬午)年 王世子 嘉禮 硏究: 가례도감의궤와 궁중발긔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22집 [2009년 10월], 107~138).

<안동별궁의 사진과 함께 ‘순정의노처녀70인: 춘원[원한]에 심금은 난무, 이왕직로퇴녀관들의 이야기’제목으로
경복궁에서 일본에 의해 쫓겨난 70명의 처녀궁녀가 살고 있는 안동별궁을 소개한 1928년 12월6일자 매일신보기사.
“그나마 내가 어려서 상감마마를 뫼시기나 할때는 그래도 살아있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늙고 뫼시든 어른은 먼저 세상을 떠납시고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애달프랴”[마지막단락내용].>

<훼손되기 이전 안동별궁의 전경. 이렇게 아름다운 안동별궁 정문은 한양도성 안 궁궐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유일하게도 3층 솟을대문이 있는 형태입니다. 이는 별궁정문 앞 삼거리의 비대칭적인 모서리지형상태를 수용한
전통한옥양식의 포용철학을 반영한 것 이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독특한 안동별궁의 정문은 1970년 3월20일
15층짜리 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서면서 속절없이 파괴됐습니다. 당시 안동별궁 정문 앞에 안국빌딩 건축허가를
내준 공무원들의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철근콘크리트빌딩이 자랑스러운 현대건축물이라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문화재보호 구호를 외치면서
또 다른 한쪽에선 천민자본주의에 매몰되어 매월 또박또박 통장에 찍히는 임대료수익을 노린 국적불명의 무자비한
철근콘크리트빌딩들이 한양도성 안 4대궁궐근처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일이 1970년대도 아닌 2021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를 파괴하고 만든 기괴한 철근콘크리트빌딩에서 얻은 비싼 임대료수익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라고 미래꿈나무들에게 과연 자랑할 수 있을까요?
도성 안 600년 고도 서울의 정체성은 이미 상실됐습니다. 정말이지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시 ‘왜 이런 건축허가를 내 주었냐’ 라고 공무원들에게 따져 물어도 도무지 대답이 없습니다.>

<안동별궁의 솟을대문 및 관련 문화재들의 처리에 관한 2017년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이렇게 500년 가까이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역사가 녹아있던 안동별궁은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청의 농간으로 민간에 불하되더니 결국 1936년 7월 12일 최창학에게 15만원에 낙찰되어 팔렸습니다. 이후 안동별궁은 1937년 1월 스케이트장이 설치되면서 훼손됐고 1937년 민영휘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민영휘의 증손자 민덕기는 1944년 재단법인 풍문학원을 인가받아 1945년 풍문여고를 개교했습니다.

<안동별궁터에 스케이트장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전한 1937년 1월14일 매일신보 기사>

<민간에 불하되어 학교가 개교된다는 소식은 전한 1937년 1월28일자 매일신보 기사>

<일제강점기 학교건물로 쓰일 당시의 안동별궁 현광루>

풍문학원이 1965년 운동장부지 확보와 건물신축을 위해 안동별궁 안의 정화당과 경연당 그리고 현광루를 모두 철거하기 전 의친왕과 의친왕비께서는 사동궁이 강탈된 후 안동별궁으로 이사하셨습니다. 해경왕녀는 당시 안동별궁으로 이사해 살았을 당시 안동별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풍문여고는 원래 별궁 땅에다가 지은 학교여서 그 학교와 내가 살고 있던 별궁 사이에는 담이 하나 막혀 있었을 뿐이었다”(Cf.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130).

<안동별궁을 지키고 있는 수백 년 된 은행나무>

<안동별궁을 원형으로 복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8년 서울시가 공예박물관을 설치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안동별궁의 잔해들이 모두 철거되고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섰습니다. 600년 한양도성 안의 역사는 이렇게 천민졸부재벌자본주의에 의해 매몰되어 지가상승에 의한
임대료수익창출이라는 미명하에 모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곧 경복궁도 철거하여 그곳에 주상복합빌딩 지어
신혼부부보금자리 마련하자는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북미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이를 역사교육콘텐츠로 개발하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보존하기는커녕
파괴하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빌딩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철근콘크리트빌딩에 무슨 한이라도 맺혀있는
것일까요? 자라나는 미래꿈나무들이 희망입니다. 이 콘크리트빌딩들이 30-40년 후 노후화되면 여기에 우리의
역사공간을 원형대로 복원해야 하겠습니다.>

의친왕과 의친왕비께서 안동별궁으로 이사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6.25가 발발했고, 고종광무태황제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의친왕께서는 전쟁에 휩쓸렸습니다. 고종광무태황제의 9남 4녀 중 5남 3녀는 유아기에 사망했고, 순종융희황제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6년 붕어하셨고, 의민황태자 영친왕은 1970년에 그리고 덕혜옹주는 1989년에 훙서하셨으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일본에 거주하셨습니다.

개전 후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공산당군에 의해 함락됐는데 북한 지배하의 서울에서 의친왕과 의친왕비께서는 빠져나오지 못하시면서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하게 되셨는데 그나마도 5녀 해경왕녀가 목숨을 걸고 노력해서 구한 것 이었다 합니다. 해경왕녀께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말로만 들어왔던 잔인무도한 공산군이 지금 내 코앞에 몰려와 있다고 생각하니, 섬뜩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살짝 담 너머로 학교를 살펴보니 공산군들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문득 빨리 어머니(의친왕비)를 피신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께서 머물고 계시던 큰 채에서 뒷담 쪽에 가까운 조그만 방으로 옮겨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다락을 뒤적여 우리 집안 가족사진들과 훈장들을 내게 넘겨주시면서 “이것을 당장에 모두 없애버려라”하고 말씀하셨다...
“저 놈들이 이것을 보면 우리들을 당장 죽일 터인데 어서 빨리 없애버려라”하고 호령을 하셨다...그 다음날 항상 돈암동집[성락원]에 머물러 계시던
아버지가 아무런 예고 없이 혼자서 짐마차를 타고 안국동 별궁에 돌아오셨다...생전 혼자서 나들이를 다녀보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그것도 짐마차를 타고 오시다니?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너무나도 절박한 상황이었다(Cf.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131~132).

<1950년대 안동별궁의 모습>

이후 의친왕께서는 1.4후퇴 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셨다가 다시 안동별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질병에 시달리시다 1955년 8월 16일 새벽 4시 안동별궁 상궁쪽방에서 의친왕비와 5녀 해경왕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78세의 일기로 훙서하셨습니다(Cf. “의친왕은 누구인가...‘항일파’왕족 상징,” 경향신문 2001-04-08).

<의친왕께서 훙서하신 상궁쪽방의 일부로 추정되는 안동별궁 터 끝자락>

이렇게 안동별궁은 조선왕국 초기 세종대왕께서 붕어하신 곳이었고 여러 왕자들과 공주들의 거처로 조선 말 대한제국 기 순종융희황제의 가례궁으로 20세기 중반 의친왕께서 기거하시다 훙서하신 곳으로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역사공간입니다. 이곳이 하루 속히 원형대로 복원되어져 황실의 역사와 문화가 계승되는 교육공간으로 미래꿈나무들을 위해 활용되어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