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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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운현궁(雲峴宮)

<운현궁 오얏꽃 문장>

운현궁은 흥선헌의대원왕(1821~1898)의 사저로 조선왕국 제26대 왕인 고종께서 탄생하시어 12세 즉위 전까지 사셨던 잠저입니다.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 앞 고개에 있어 운현(雲峴)궁이라 불렸습니다. 고종 즉위 후 흥선헌의대원왕이 이곳에서 국정을 운영했고 예전에는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고종3년(1866) 고종광무태황제와 명성태황후께서 가례를 올린 곳이기도 합니다.

<1866년 47세 때 촬영된 운현궁 제1대 종주 흥선헌의대원왕.
복식 위에 늘어뜨린 5개의 장식은 ‘병부주머니’로 당시 군대동원지휘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출처-『은자의 나라, 한국』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의 컬렉션, 경향신문 2014-12-08>

고종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헌의대원왕이 운현궁에서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됐습니다. 1917년 3월22일 흥선헌의대원왕의 장손 이준용의 사후 5월28일 이우왕자께서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받았습니다.

<고종광무태황제의 형 흥친왕 이재면의 며느리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손자 영선군 이준용의 재취로
흥영군 이우왕자의 양모로 1955년 78세로 별세하기 까지 운현궁의 안주인이셨던 광산김씨공비[公妃金氏, 1878~1955]>

현재 운현궁 내 전각들은 대원군 섭정기인 1863년에서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노락당과 노안당은 1864년 9월에 이로당은 1870년에 준공됐습니다. 1910년 건축된 양관과 함께 사적 제257호로 지정됐는데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소년시절 자주 오른 노송(老松)이 남아 있습니다.

<운현궁 안채 이로당>

1940년대 후반 대한민청 본부사무실로 사용됐고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9.28서울수복> 시까지 순정효황후께서 창덕궁 낙선재를 떠나 잠시 피신해 계셨습니다. 이후 1952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당선자의 숙소로도 사용됐습니다.

1945년 9월23일 이승만 주도로 제정된 <구황실재산처리법>에 따라 황실재산이 강제로 국유화되는 과정에서 운현궁도 이에 포함됐지만 이우왕자의 부인 박찬주께서 국회탄원을 통해 노력한 덕분에 흥친왕의 개인재산으로 인정받아 이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운현궁을 국가재산으로 강탈하지 못해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전주이씨 씨족에 불과했던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직계황족인 이우왕자의 둘째아들 이종(1940~1966)을 대신 양자로 줄 것을 박찬주께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거절되자 황족에 대한 견제가 더욱더 노골화됐다 합니다.

운현궁은 한때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했었으나 왜정 기를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습니다. 일부는 친일역적매국노에 강제로 팔려 현재 양관(洋館)은 덕성여대부설 평생교육원이 소유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출생하신 안채의 일부는 현재 일본문화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요? 일제식민청산을 외친지 반백년! 수많은 학생들이 역사공부를 위해 견학지로 사랑받는 운현궁 안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문화원! 그 누구도 이 문화원 위치의 부당성에 대해 민원제기도 하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출생하신 운현궁 안채 쪽에 당당히 들어서 있는 일본문화원. 평일임에도 이용객이 거의 없어 개점폐업상태입니다.
죄 없는 종로경찰서 소속 경관 한 두 명만이 추우나 더우나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서울시내 중요역사유적지 코앞의 일제식민잔재도 청산하지 못하면서 과연 ‘토착왜구’니 ‘친일역적매국노’니 라고 외칠 수 있을까요?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출생하신 안채 쪽 일본문화원이 조속히 철거되어 운현궁 원형이 복원되지 않는 한 일제식민잔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운현궁에서 촬영된 사진. 상단좌측 4녀 해숙왕녀, 차녀 해원왕녀, 3녀 길영왕녀, 4남 창길왕자부인, 차남 이우왕자부인 박찬주여사,
3남 홍길왕자부인, 장녀 해완왕녀, 5녀 해경왕녀, 박찬주여사여동생, 하단좌측 5남 수길왕자, 8남 경길왕자, 차녀 해원왕녀부군,
3녀 길연왕녀부군, 4남 창길왕자, 차남 이우왕자, 3남 홍길왕자, 장녀 해완왕녀부군, 박찬주여사둘째동생, 6남 명길왕자, 박찬주여사 셋째동생>

<운현궁 양관에서 촬영된 이우왕자>

<이우왕자께서 촬영했던 운현궁 양관정문의 2021년 현재의 모습. 궁의 주인은 오간대 없고 궁의 기능은 상실된 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사무실로 쓰이고 있습니다.>

<운현궁 양관 주변은 더 심난합니다. 주차장이 들어서 자동차매연과 온갖 쓰레기 인간방뇨로 추정되는 오물들로 널려져있습니다. 2021년 현재의 상황입니다.>

<운현궁 양관 바로 뒤에 있는 육사당. 서른 두 칸의 당당한 겹처마 팔자지붕 형태로 1969년 원곡 김기승(金基昇, 1909-2000)이 쓴 [六四堂] 휘호 현판이 남아있습니다.
황실과 황비가 될 집안이 모여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던 상견례 공간이었습니다. 현재 철재난간에 둘려 접근이 금지됐고 마루에는 먼지가 쌓인 채 청소도 되지 않고 제 용도로
쓰이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육사당 담장과 삼환빌딩 쪽 입구에는 쓰레기들과 잘려나간 나뭇가지들 그리고 철조망들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습니다. 마치 이 모습은
이승만정부 이후 역사의 담장 밖으로 밀려나가 소외되고 핍박받은 황실의 역사와 황실을 예우하지 않는 작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이제 오래 닫아놓아 묵은내 나는
육사당 안에 황실의 온기와 빛을 들여 본래의 용도로 활용될 수 있도록 조속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1991년 이우왕자의 장자 이청황손이 서울시에 운현궁을 매각하면서 민간업체가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이를 운영관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운현궁의 역대 종주
제1대 :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興宣獻懿大院王 李昰應, 1820년~1898년)
제2대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1912년)
제3대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1917년)
제4대 : 이우왕자(李鍝, 1912년~1945년)
제5대 : 이청황손(李淸, 193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