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황실궁능 / 종묘 / 사직단 / 환구단 / 박물관
Daehan Imperial Household
- 왕실황실궁능 / 종묘 / 사직단 / 환구단 / 박물관
- 별궁/잠저
- 선희궁-수진궁-순화궁
선희궁(宣禧宮)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선희궁터’>
선희궁은 영조대왕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제향을 위해 건립된 제사궁(祭祀宮)으로 영빈방(暎賓房)에 속해 있던 궁장토와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빈이씨가 졸서한 영조40년(1764)에 건립됐습니다(『영조실록』40년 11월 5일). 본래 경복궁 서쪽 종로구 신교동(新橋洞) 순화방(順化坊)에 있었습니다.
<영조대왕 어진.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국립서울맹학교 안에 설치된 선희궁 터 안내판. 서울맹학교는 1913년 조선총독부에의해 선희궁 터 안에 개교됐습니다.
100여 년 전 서울에는 수많은 공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왕실의 역사와 권위가 서려있던 궁을 철거하고 학교를
만든 총독부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한민족역사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아름답게 건축된 왕궁들은 이렇게 풍수지리사상을 악용한 친일역적매국노들과 총독부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의해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철저히 파괴되고 멸실됐습니다.>
처음에는 의열궁(義烈宮)이였으나 1788년 선희궁으로 바꾸었습니다. 고종33년(1896) 숙종대왕의 후궁이었던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제사궁인 육상궁(毓祥宮)으로 위패가 옮겨졌으나 광무1년(1897) 선희궁으로 되돌려졌습니다. 융희1년(1907) 궁내부령으로 내수사(內需司)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고 선희궁 소속 토지도 제실재산관리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융희2년(1908) 황실제사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다시 합사됐습니다.
1913년 4월 1일 친일역적매국노 이완용과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생원 맹아부(현 서울농학교)가 설립되면서 선희궁 터는 훼손-멸실되고 말았습니다.
<국립서울농학교 개교100주년기념비>
<서울농학교 운동장 아래 철근콘크리트축대에 파묻혀 있는 선희궁 담장.
우리 모두의 소중한 조선왕실역사유적이 이렇게 방치돼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육상궁에는 영조대왕의 후궁이자 효장세자의 친모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연호궁(延祜宮), 선조대왕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대왕의 친모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숙종대왕의 후궁이자 경종대왕의 친모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대빈궁(大賓宮), 정조대왕의 후궁이자 순조대왕의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이 함께 옮겨 왔습니다. 1929년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친모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덕안궁(德安宮)까지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가 모셔지게 됐고 이때부터 육상궁은 칠궁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300년 넘는 세월 선희궁 터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좌]와 은행나무[우]>
이승만대통령이 육상궁이었던 칠궁의 일부를 철거하고 경무대(현 청와대)를 지으면서 칠궁은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후 청와대에 들어와 살던 역대 대통령들은 자살하거나 감옥에 갔고 암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길을 떠나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 임금을 출산했지만 왕후가 아니어서 종묘에 합사되지 못한 한 많은 후궁들의 제사궁이 훼손되어 생긴 후궁들의 저주라는 항간의 주장이 있습니다. 칠궁의 훼손은 왜정 기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지속되는 저주를 끊기 위해서라도 선희궁이 있는 칠궁은 하루속히 원형대로 복원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수진궁(壽進宮)
<어김없이 철근콘크리트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 2021년 현재의 수진궁터. 수진궁에서 수동 혹은 수진방굴
수진박골이라 불리던 수진동 마을이름이 유래됐습니다. 이후 수진동은 수송동과 청진동 일부로 나뉘었습니다.>
수진궁은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일대 조선건국 초 정도전이 살던 집터의 일부에 세워졌습니다. 세종대왕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던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예종의 둘째아들이자 평원대군의 봉사손인 제안대군의 집을 사당으로 사용하면서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왕자녀들과 출가하기 전 사망한 12세 이하 어린 공주-옹주들의 제사를 합동으로 모시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종39년(1544) 수리됐고 인조대왕 이후 후사가 없는 왕자의 재산과 대비전의 사적인 재정을 조달-관리하는 곳으로 기능했습니다. 숙종대왕 때는 현종대왕의 비 명성왕후의 명으로 공식적으로 완전한 제사궁이 됐습니다.
정조대왕은 비빈과 대군들의 묘와 사당에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으니 묘에서는 봄가을 제향을 지내고 수진궁에서는 한식 때 한번 간소하게 지내라 명했습니다. 수진궁에 합사된 신위는 모두 20위이며 각 묘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원대군 강령부부인 제안대군 상산부부인 영창대군 명선공주 명혜공주는 경기도 광주시에, 용성대군 의창군 양천군부인 경빈이씨는 풍양(豐壤)에, 낙선군과 동원군부인은 청송군에, 숙신공주는 서산시에, 귀인김씨는 망우리에, 소의유씨는 은평진관에, 정보가 전혀 없는 한 '대군아기씨'는 광주에, 숙의나씨는 서산에, 숙원장씨는 연서에, 명빈김씨는 아차산에 있습니다.
<수진측량학교 터 비석>
대한제국 기 고종광무태황제는 유길준에게 찬조금을 하사하시어 수진궁을 흥사단사무실로 쓰게 했습니다. 순종융희황제 때(1908)는 측량술을 가르치던 사립교육기관 수진측량학교가 개교됐지만 일본에 의해 융희3년(1909) 폐궁되고 말았습니다. 폐궁 후 1년은 궁으로서의 모습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1910년 한일병탄 후 훼철되어 일본인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현재 수진궁터 위에는 지하6층 지상 15층짜리 고층 철근콘크리트주상복합아파트가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그나마 남아 있던 터의 모습이 완전히 멸실되고 말았습니다.
<수진궁터에 설치된 발굴모형과 발굴조사기관 그리고 수진궁안내판>
순화궁(順和宮)
<순화궁 터에 어김없이 들어선 고층철근콘크리트 태화빌딩>
순화궁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 26(관훈동 194번지)에 있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 부부가 살았던 집이었습니다. 중종대왕이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순화궁’이 됐다는 설이 있으나 중종에게 순화공주란 딸이 없었기에 사실이 아닙니다. 아마 중종대왕과 문정왕후의 딸 효순공주와 구수영의 증손자 구사안이 혼인 후 중종이 집을 고쳐 지어준 것이 와전된 듯합니다.
구사안의 동생 구사맹(후손은 현재 LG그룹 일가들)은 선조대왕의 서5남 정원군의 장인이었습니다. 정원군의 장남이자 구사맹의 외손자가 바로 인조대왕입니다. 그래서 인조대왕이 어렸을 때 외가인 순화궁에서 가끔씩 머물렀다 합니다. 그 때 장난치다 궁내에 있던 연못에 빠진 적이 많았는데 인조가 즉위한 후 그 연못을 용(왕)이 빠졌었다하여 ‘잠룡지’(潛龍池)로 불렸습니다. 이후 영조대왕이 방문하여 보관되어있던 효종대왕의 어필을 본 뒤 구씨들을 불러 상을 주거나 등용하라고 명한 것을 볼 때 영조 연간까지는 구씨 집안에서 소유-관리하였던 것 같습니다.
19세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할 때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헌종대왕의 후궁 경빈김씨가 헌종 사후 김흥근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 때부터 경빈의 궁호인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렸습니다. 경빈김씨는 광무11년(1907) 6월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습니다.
<순화궁터 표지석>
대한제국 말기 융희2년(1908) 궁내부 대신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곧 이윤용의 동생 친일역적매국노의 원흉 이완용의 차지가 됩니다. 이후 순화궁에 속했던 궁속들은 서소문 안에 있던 순헌황귀비의 동생 엄준원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넓은 궁에 살다 좁은 곳으로 옮긴 궁속들은 불평했고 급기야 이런 불만이 신문에까지 실렸다 합니다.
<친일역적매국노이며 황실파괴의 원흉 이완용의 핏줄들. 앞줄 왼쪽 손자 이병주, 가운데 이완용, 안긴 아이 손자 이병철,
뒷줄 왼쪽 손자 이병길, 뒷줄 가운데 차남 이항구, 뒷줄 오른쪽 손자 이병희. 이완용의 품에 안긴 손자 이병철의 이름이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과 같아 최근 이병철이 이완용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온라인상에서 떠돌았습니다. 아래는 이병철이
이완용의 손자라는 루머에 관해 보도된 신문기사내용입니다.>
삼성家 이건희·홍라희 친일파 후손 루머 살펴보니
김태규 기자 승인 2017.08.18 18:02
▲ 이완용의 가족관계도(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의 넷째 아들 이병철은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과 다른 인물이다 / 홍진기의 가족관계도(아래). 홍라희·홍석현 남매의 부친인 홍진기와 외조부인 김신석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대표적 친일인물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 SNS상에는 이완용의 손자 중 이 회장의 아버지인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전 회장의 이름이 있다며 이 같은 주장을 담은 글이 반복돼 올라왔다.
이 회장이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소문은 사실 최근에 제기된 것이 아니다. 이미 십년여 전부터 이 같은 주장이 반복돼왔으나 삼성 측은 이에 대해 마땅히 대응하지 않았다.
SNS 이용자들은 ‘이 전 회장을 분명히 지목해 글을 올린 사람이 있는데 고발당한 사례가 없다’며 삼성이 대응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이를 확신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이들은 이 전 회장의 이름이 이완용의 손자와 같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이완용의 가족 관계도를 살펴보면 차남 이항구의 넷째 아들 이름이 ‘이병철’로 이 전 회장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회장의 아내인 홍라희 전 삼성리움미술관 관장과 처남인 중앙일보·JTBC 홍석현 전 회장에 대해서도 친일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판사를 지낸 홍진기이고 외조부인 김신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라며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한 관계자는 <투데이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회장이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잘못된 정보가 계속 떠도는 것 같다. 이완용과 이 회장은 집안도 다르고 혈연으로 관계되는 것도 없다”고 설명했다.실제로 이완용은 황해도 금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우봉 이씨(牛峰 李氏)고 이 회장은 경주 이씨(慶州 李氏)로 본관이 다르다. 또 이완용의 손자 이병철(李丙喆)과 이병철(李秉喆) 전 회장의 이름은 한자 표기가 다르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홍진기·김신석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며 “(홍 남매의 아버지인) 홍진기는 1944년 9월 전주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고 밝혔다. 이어 “홍진기의 장인 김신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 맞다”고 설명했다.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순화궁의 주인이 된 이완용은 이곳에 전세를 놓았는데 전 숙수 출신이자 명월관 사장 안순환이 세들어 와 태화관이 됐습니다.
태화관이 들어온 순화궁은 의친왕의 사동궁과 담벼락 하나사이로 바로 옆이었는데 의친왕이 항일독립투사들에게 짜장면을 사주시며 3.1만세운동을 준비했고 1919년 3.1만세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이 낭독됐던 곳이었습니다. 3.1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의친왕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을 준비했던 곳으로 “1919년 대동단과 의친왕 망명미수사건” 또는 “명월관10대사건”으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의친왕의 대동단망명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1919.11.27자 기사>
<‘이강공전하옹립[개입]사건 전협일파 37명에 대한 대동단사건공판’을 보도한 『매일신보』1920.11.19자 기사>
<‘3.1운동100주년기념비’ 안내판. 이 안내판에는 삼일독립선언문 작성 및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의친왕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의친왕께서 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사동궁과 담벼락 하나사이의 지리적 조건도 있었지만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국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친일역적매국노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습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친일역적매국적인 모든 조약들을 무효화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Cf. 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주인 안순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즉 궁중연회의 최고 주방장을 지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사퇴한 그는 명월관과 태화관을 차린 배일(排日)사상가였습니다(Cf. ‘고하 송진우전기’; “‘요릿집’태화관이 3.1독립선언 장소로 낙점된 까닭은?,” 동아일보 2018-06-16).
<순화궁터에 들어선 명월관의 분점 태화관. 의친왕의 주도로 3.1만세운동이 계획됐고 독립선언문이 작성된 곳입니다. 사진출처-동아일보>
이렇게 친일역적매국노 이완용이 소유한 집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당황한 이완용은 1921년 감리교선교부에 순화궁 터를 팔았습니다. 이완용이 순화궁 터를 감리교선교부에 팔 때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명월관 측은 쉽게 나가려하지 않은 채 영업을 계속했는데 감리교선교부 측에서 술판이 벌어질 때마다 마당에 들어와 찬송가를 부르며 영업방해를 했습니다. 이에 지지 않고 명월관 측에서는 영업이 다 끝난 새벽에 선교부 측 사람들 방문 앞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쳤다 합니다. 낮에는 감리교 깃발이 밤에는 명월관 깃발이 번갈아 꽂히는막장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이 싸움의 승자는 감리교였습니다. 그 이유는 감리교 측에서 성조기를 꼽았고 성조기를 함부로 뽑는 것이 외교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1938년 감리교선교부는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새로 지어 사용했는데 일제 말 징발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화궁은 나름 잘 보존됐지만 8.15광복 후 이승만이 경찰청사로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하야 후 다시 감리교선교부로 관리소유권이 이전되어 태화기독교사회관이 운용됐습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렸고 그 와중에 순화궁 전각들도 다 같이 헐려나갔습니다. 이후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태화회관과 하나로빌딩이 들어섰습니다.
<순화궁터 위에 어김없이 들어선 고층 철근콘크리트빌딩 태화회관과 하나로빌딩>
Compiled & Written by
Dr. Young-Gwan Kim, Academic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