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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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성락원(城樂園)

<성락원 송석정>

성락원은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의친왕 이 강 전하의 별장(1910~1945)으로 조선후기에 조성됐고 별칭은 성락장(城樂莊)입니다.

<1915년 최초 측도 1937년 3차 수정 측도된 스탠포드대학 소장 ‘이만오천분일지형도:
조선’[二万五千分一地形圖:朝鮮]에 명확히 표기돼 있는 ‘이강공별저’. 출처-오마이뉴스>

<192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 성북리 지적원도.
토지조사사업 직후 5번지[좌]와 일부확대 부분[우]. 출처-오마이뉴스>

<‘대정4년[다이쇼천황-大正天皇4년-1915] 이강공’이라는 뚜렷한 글씨와 함께 의친왕 이강공이 소유주로 기록돼 있는
‘성북동 5번지 폐쇄토지대장’[좌]과 일부 확대한 부분[우]. 출처-오마이뉴스>

성락원은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앞뜰 · 안뜰 · 뒤뜰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됩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도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습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겨진 ‘雙流洞天’이란 글씨는 성락원의 지맥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쌍류동천과 용두가산 주변에는 200~300년 된 엄나무를 비롯한 느티나무ㆍ소나무ㆍ참나무ㆍ단풍나무ㆍ다래나무ㆍ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 바깥을 가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쪽 아래에는 고요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쪽 늪 암벽에 새겨진 ‘장빙가’(檣氷家)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의 것입니다. 안뜰은 본재누각(本齋樓閣)ㆍ영벽지(影碧池)가 있고 생활 · 수학 · 수양의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본채 누각만이 남아 있습니다.

성락원은 대동단망명사건 후 사동궁에 감금되어 탄압과 감시의 시기를 보내셨던 이 강 의친왕 전하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황실재산국유화 목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제정된 <구황실재산처리법>에 의해 성락원은 강제로 탈취됐습니다. 경복궁같이 큰 궁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락원은 국유화과정에서 이승만에 의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일반에 매각됐습니다. 그리고 그 매매차익은 개입한 농간모리배들에게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Cf. “황손 이석씨 ‘궁궐생활’소개한 글 게재,” 연합뉴스, 2005년 01월30일).

<성락원에서 촬영된 의친왕 전하 유튜브 업로드영상.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XR2B5LDw4xA>

의친왕의 5녀 해경왕녀의 저서 <마지막황실의 추억>에는 해경왕녀께서 성락원에서 출생하셨고 어린 시절 의친왕비와 함께 지내시며 가벼운 등산을 하셨고 뒷산에서 쑥과 버섯을 따 끊여 드셨다는 성락원 관련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해경왕녀께서는 성락원을 ‘이강공별저’ 혹은 ‘성북동별장’으로 부르셨습니다(Cf.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의친왕아닌 고종의 내시였다,” 오마이뉴스, 2019년 06월11일).

<성락원에서 촬영된 해경왕녀. 출처-해경왕녀소장자료>

<1934년 성락원에서 열린 의친왕의 첫째 딸 이영왕녀의 결혼식. 앞줄 왼쪽 네번째가 의친왕, 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의친왕비,
다섯번째가 당시 네 살이셨던 이해경왕녀. 그 옆이 신부 이영왕녀>

<성락원을 ‘의친왕별장자리’로 보도한 1962년 6월2일 동아일보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