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황실궁능 / 종묘 / 사직단 / 환구단 / 박물관
Daehan Imperial Household
- 왕실황실궁능 / 종묘 / 사직단 / 환구단 / 박물관
- 별궁/잠저
- 누동궁-도정궁
누동궁(樓洞宮)-전계궁(全溪宮)
<누동궁 터의 현재 모습. 주차장이 들어섰고 중국식당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밥집과 술집들로 가득합니다.>
누동궁은 한성부 북부 안국방 현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8,264㎡(2,500평) 규모의 궁으로 철종대왕의 사친 전계대원군 사손들의 사저이자 종택이었고 불천지위3위를 모셨던 전계궁이 있었습니다.
원래 여기에 살았던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1785~1841)은 사도세자의 서장남인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의 아들이었습니다. 원래 왕과 세자가 아닌 왕족들은 궁궐 밖에 나가 살아야했고 영조대왕의 손자와 증손자인 은언군과 이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광의 인생에서 한양에 머무른 세월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은언군은 사실상 유일한 왕(정조대왕)의 남동생인데다 큰아들 상계군 이담이 최고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누이 원빈홍씨의 양자로 입적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대왕의 재위 기간 내내 위험인물로 찍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번 옥사에 휘말려 귀양을 갔었고 죽을 때까지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귀향 간 후에도 끊임없이 노론세력에 의해 역모의 주범으로 지목됐으며 그나마 정조대왕의 비호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조1년(1801)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였던 은언군의 아내 송마리아와 며느리 신마리아가 순교했습니다. 이에 은언군은 서자 이철득(李鐵得)과 함께 유배지에서 탈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붙잡혔고 이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같은 해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전부 강화도 은언군이 살던 곳으로 옮겨졌고 이광 역시 30년을 그곳에서 가난한 농사꾼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후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순조30년(1830) 효명세자까지 요절하면서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대왕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강화도에 있을 때 낳은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이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정착해 살게 됐습니다. 순조31년(1831) 3남인 이원범을 얻고 평범하게 자식들을 키우며 지내다 헌종7년(1841)에 사망했습니다.
누동궁 역사의 시작
<전계대원군의 3남인 철종대왕 이변[哲宗 李𣅹]>
그러나 이광이 죽고 3년 뒤인 헌종10년(1844)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이광의 장남 이원경이 연루되어 처형당했고 나머지 아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됐습니다. 5년 뒤 이원범이 철종대왕으로 즉위하면서 군호가 없던 이광은 먼저 전계군으로 봉해진 뒤 곧바로 왕의 친아버지가 받는 ‘대원군’작호를 받아 ‘전계대원군’이 됐습니다. 철종대왕은 자신의 형제들에게도 군호를 주어 앞서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으로 이욱은 영평군(永平君 李景應, 1828~1902)으로 봉했습니다.
그리고 역모로 죽고 자식도 없었던 큰 형 회평군 대신 살아있고 별 다른 문제가 없던 둘째 형인 영평군 이욱에게 한성부 시절 가족들이 살았던 자리를 증축 보수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계대원군의 신위는 몇 대가 흘러가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영평군의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게 했습니다. 이것이 누동궁 역사의 시작입니다. 궁 이름은 말 그대로 ‘누동’(樓洞)에 있다는 뜻으로 동 이름은 근처에 있던 다락우물(樓井)에서 따왔습니다.
누동궁 주변의 지명이 ‘궁동’, ‘익동’, ‘누동’, ‘석정동’ 등인데 이 중에서 ‘궁동’(宮洞)은 누동궁이 있던 동네라 하여 ‘궁골’이라 하다가 ‘궁동’이 되었고 ‘익동’은 누동궁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였던 익랑(翼廊, 즉 날개가 뻗은 듯이 쭉 늘어서 있는 행랑)에서 유래했는데 처음엔 ‘익랑동’(翼廊洞), ‘익랑골’이라 하다 나중에 ‘익동’(翼洞)이 됐고 한자는 나중에 ‘익’(翼)이 ‘익’(益)으로 바뀝니다. ‘석정동’(石井洞)은 돌우물골 이라고도 하는데 누동궁 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명이 유래했습니다. 이 동들은 1914년의 지명 통합 때 ‘익동’(益洞)의 ‘익’(益)에 인근 ‘정선방’(貞善坊)의 ‘선’(善)을 붙여 ‘익선동’(益善洞)이 됐습니다.
<1924년 7월9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누동궁 행랑의 일부>
전성기와 마지막
누동궁은 철종대왕의 생가로 선대왕의 생가로써 궁과 그 후손들은 융숭히 대접받았습니다. 누동궁 1대 사손 영평군 이경응은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실의 웃어른으로 종척집사의 직위를 여러 번 맡았고 2대 사손 청안군 이재순(淸安君 李載純, 1851~1904)은 군의 요직과 고종황제를 호위하는 직책을 두루 맡았습니다.
<청안군 이재순[1851~1904]의 사진. 이 사진은 대한황실문화원에서 주관하는
[국외소재문화재찾기 알렌컬렉션연구사업]에서 2019년 7월1일 미국 오하이오주 와우션에
거주하는 알렌박사후손들을 방문하여 Ruth Zimmerman여사의 저택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고종6년(1869)에는 안국동별궁에 모셔진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경행방에 있던 영평군의 집으로 옮겨 전계궁(全溪宮)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별다른 일은 없었으나 영평군의 아들 청안군이 춘생문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영평군은 광무6년(1902), 청안군은 광무8년(1904)에 죽었고 3대사손이 되어야 할 풍선군은 이미 고종27년(1890)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청안군 사후 당시 15세 밖에 안 된 풍선군의 아들인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1890~1958)이 궁주(宮主)가 되었습니다.
<누동궁의 3대사손이 된 청풍군 이해승>
이해승은 한일병탄 이후 일제에게서 후작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고 당시 돈으로 16만 2천 원을 받아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서면서 재산을 많이 불렸습니다. 주인의 재산이 조선 최고의 수준이니 누동궁 역시 그에 걸맞게 상당히 화려했습니다. 당시의 누동궁을 방문했던 의친왕의 다섯째 딸 해경왕녀는 “어머니와 가끔 큰 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었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 주인으로 계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도자기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의 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라고 회고했습니다.
<1936년 조선신문사-대경성부대관에 표시된 누동궁 주변 일대. 노란색 영역 안이 누동궁입니다.>
그러나 이해승이 1930년대에 누동궁을 팔고 서대문구 홍은동으로 이사하여 스위스그랜드호텔을 개원하며 누동궁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정세권(鄭世權, 1888~1965)이 매입한 누동궁 자리(익선동 166번지 일대)에는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마을이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부지는 분할되어 행랑길 누동궁1·2길로 나뉘었다가 다시 누동궁1·2·3길로 나뉘었는데 2010년 도로명주소를 개편하면서 수표로28길로 통합되었습니다.
서울시는 2004년 이 일대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아파트, 관광호텔, 오피스텔, 근린생활시설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10여년을 표류하다 무산됐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한옥보존지역’이 아닌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잘못된 개발정책으로 누동궁 터 근처 100여년 넘은 서울 안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오진암이 오히려 철거되고 마는 큰 피해를 보게 됐습니다. 마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친일역적매국노들은 거액의 은사금과 함께 호의호식(好衣好食)한 반면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셨던 고종광무태황제 순정효황후 의친왕 이우왕자를 비롯한 황실직계구성원들은 역사의 담장 밖으로 쫓겨나 재산이 몰수되고 온갖 서러움과 핍박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친일역적매국노들. 왼쪽부터 이완용[1858~1926], 이근택[1865~1919], 이지용[1870~1928], 박제순[1858~1916], 권중현[1854~1934].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셨던 고종광무태황제를 무참히 독살하고 이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하며 산 날들이 고작 9년에서 24년 입니다.
이들이 먹고 쓰고 남은 돈과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들 그들이 떳떳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더욱더 한심한 사실은 이완용의 조카 이병도[1896~1989]는 ‘조선사’집필로
일제식민지배의 정당성과 일제식민사관을 확립했고 오히려 고종광무태황제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암군[暗君]으로 왜곡시킨 친일역적매국사관주의자였습니다.
이병도의 아들 이춘녕은 서울대 농대학장이었고 이춘녕의 큰 아들 이장무는 2006년 서울대총장이 됐고, 둘째 아들 이건무는 2003년 노무현정부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리고 2008년 이명박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이 됐습니다. 노태우정부 시절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이들의 9촌 숙부입니다. 해방 이후 친일역적매국노들과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원인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했고 친일역적매국노들과 야합했기 때문입니다. 을사오적의 괴수인 이완용의 자손들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며 온갖
국가요직을 두루 거치며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거머쥔 역사의 팬은 결과적으로 망국의 모든 책임을 고종광무태황제에게
뒤집어씌웠고 황실의 항일독립투쟁사를 묻어버렸고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왜곡시켰습니다
[Cf. “친일파 후손, 서울대총장 임명 옳은가?,” 오마이뉴스 2006-06-15]>
<왼쪽부터 을사오적 친일역적매국의 괴수이며 고종광무태황제 독살을 주도했고 의민황태자 덕혜옹주 이우왕자 등을 강제로 일본에
볼모로 삼고 의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훼방하기 위해 강제로 미국유학을 모의하는 등 황실구성원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른
황실 죽이기 황실파괴의 원흉 이완용, 이완용의 조카 이병도,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와 이건무, 같은 우봉이씨 일족인 이어령. 이 가계도만
보면 왜 황실의 항일독립투쟁역사가 은폐됐고 의친왕이 국가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됩니다.
사진출처-Daum 블로그 한민족역사문화답사>
이렇게 일제강점기 계량한옥은 보존됐고 본채 별채 등 50~100년 전 각각 시기를 달리해 지어진 전통한옥양식의 오진암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Cf. “박정희 시대 요정정치산실, 꼭 헐어야 했나,”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프레시안 2014-01-31).
<철거되기 전 오진암의 입구와 아름다운 지봉의 모습. 사진-종로문화재단, 연합뉴스>
<처참히 헐려나간 오진암의 안타까운 모습>
오진암은 1920년대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철거되면서 기단석 등 궁궐석물들이 부재로 사용되어 건축된 ‘소궁궐’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었습니다. 서울시등록음식점 제1호로 1950년대 협객 김두한이 단골로 출입했고 60-70년대 정권 실세들과 정객들이 모여 요정정치를 펼쳤던 곳입니다.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7.4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한 곳이기도 합니다(Cf. “서울3대 요정 ‘오진암’사라진다,” 한겨레 2010-09-08).
<오진암이 헐려나간 자리에는 별세개짜리 비즈니스호텔이 들어섰습니다. 벽 한쪽에는 오진암의 역사를 소개하는 게시판이 걸려있습니다.
근래 들어 서울 안 600년 전통의 피맛골도 속절없이 멸실됐고 그 곳에 피맛골의 역사를 알리는 게시판만이 걸려있습니다. 역사전통을 철거하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호텔을 올려 얻은 게 무엇일까요? 인허가를 해준 관련 공무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요? 개발이익으로 얻은
돈으로 하루 열 끼니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200년을 사는 것도 아닌데 개발업자들은 오로지 수익형 주상복합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 못
올려 안달이 났으니 말입니다. 한양도성 안 600년 종로-중구지역은 네모 반듯 천편일률적인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들로 가득합니다!
과연 우리는 미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수 있을까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2010년대 후반부터 뉴트로바람을 타고 누동궁 터에 들어선 한옥들이 문화상업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외국관광객들과 청년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습니다. 삼청동에서 천정부지 비싼 임대료 상승을 견디다 못한 몇몇 젊은 예술가들이 ‘다다익선’이 라는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1,000만원 단위 소액투자를 받아 작은 공방과 카페를 개업하면서 이 가게들이 유명세를 탔고 SNS BLOG에 소개되면서 서울시내 젊은 사업가들이 합세하면서 지금은 200여개가 넘는 다양한 상업휴식문화시설들이 들어섰습니다(Cf. “맛과 멋이 다다익선[多多益善],” 한국경제 2017-08-11).
<2016년 2월28일 KBS ‘다큐멘터리3일’ 442회에 소개된 누동궁 터에 들어선 한옥마을. 출처-KBS>
<누동궁 터에 자리 잡은 익선동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건축가 겸 독립운동가 정세권[鄭世權, 1888-1965]이 총독부가
일본가옥을 지어 분양하려던 계략을 미리 알고 전 재산을 들여 매입한 후 한옥주택을 건설, 일반에 분양했습니다.
이렇게나마 남게 된 100년 넘은 계량한옥들은 옛것을 찾고 그리워하는 지각 있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지켜져 2018년
철거위기를 넘겨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외국인들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로 사진촬영장소로
영화촬영장소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200여개의 카페와 레스토랑 전통찻집 공방 갤러리 근대복식대여점 등
철근콘크리트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에게는 서울 안에서 한국의 역사전통문화를 그나마 체험할 수 있는 희귀한 공간으로 탈바꿈됐습니다.>
도정궁(都正宮)
<도정궁 터의 현재 모습. 이승만정부가 도시개발 명목으로 사직터널을 만들면서 도정궁의 원형이 멸실됐고 도로 가장자리 모서리에 도정궁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사대문 안 종로구-중구 도로에는 이런 표지석이 수백 개 설치돼 있습니다. 이런 표지석이 늘어나는 만큼
600년 한양도성 안의 역사유적들은 훼손되고 멸실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기야 역사유적지 위에 철근콘크리트빌딩을 올리고 도로를 내면
수천억 원의 부동산개발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이 황금만능배금주의 유혹으로부터 인허가권을 갖은 공무원들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렇게 600년 한양도성 안 역사유적들은 도로가 나거나 철근콘크리트 주상복합아파트가 인허가 나면서 거의 멸실되고 말았습니다.>
<도정궁 터에 들어선 주유소와 철골 구조물들>
도정궁은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262번지 사직단 서남쪽 옆에 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중종대왕의 서자이며 제14대 선조대왕의 친아버지와 그 종손들이 머물던 사저이자 선조대왕의 잠저(潛邸)입니다.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이 명종대왕의 뒤를 이어 선조대왕으로 즉위하면서 도정궁은 조선왕실의 뿌리가 됐습니다. 따라서 다른 일반 종친 집들과는 대우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덕흥군이 송나라 복왕의 예를 따라 왕의 친아버지 자격으로 대원군 칭호를 받았고 이에 따라 잠저후원에는 대원군가묘 덕흥궁(德興宮)이 건립됐습니다. 그리고 덕흥대원군의 종손(宗孫) 4대까지 대군(大君)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도정(都正)직을 대를 이어 세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궁의 이름이 ‘대대로 도정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도정궁이 됐습니다.
<덕흥궁[德興宮]. 도정궁 후원에 있던 불천지위6위-창빈안씨[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
덕흥대원군[선조의 친부],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친모],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큰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의 첫째 부인],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의 둘째 부인]-를 모신 사당으로 1569년 선조대왕의 명으로 잠저에 창건됐습니다. 1950년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339번지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德陵齋室, 水落山房)로 이전되어 영년 봉묘됐고 각 기신일에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더위키>
1860년대 초 13대 사손 이하전의 정치적 몰락으로 왕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도정궁은 몇 년 간 방치됐습니다. 고종2년(1865) 효명세자의 빈이었던 대왕대비조씨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냥을 특별히 획하(劃下)하여 호조에서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1913년 12월 화재로 150칸 중에 20~30칸만 남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남은 영역도 1931년 일본에 의해 200여 필지로 분할되어 거의 다 팔렸습니다. 이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훼손할 목적이었습니다.
8.15광복 후에는 이승만정부의 도시개발 명목으로 사직터널공사가 계획됐고 1967년 사직터널이 완공-개통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전각들이 팔리고 헐려 도정궁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변에는 도정궁 부속 건물로 보이는 폐가가 흉물스런 모습으로 버려지고 방치된 채 남아있습니다. 도정궁 터 위에는 여지없이 철근콘크리트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1967년 1월21일 사직터널 개통식. 사진출처-서울사진아카이브>
<도정궁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폐가의 일부. 수십 년째 흉물스럽게 버려지고 방치돼 있습니다.>
<종로구청과 서울시 공무원들에 의해 인허가 되어 도정궁 터 안에 들어선 철근콘크리트주상복합아파트 ‘광화문스페이스본’.
2007년 준공-분양 당시 부동산업자들은 잠저궁터에 자리 잡아 풍수가 뛰어나고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범상치 않은 곳으로 홍보했습니다.>
광진구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 몇 개의 전각이 옮겨져 보존돼 있습니다. 현재 3개의 건물이 도정궁터에 남아 있는데 하나는 경원당으로 철종대왕 때 제주도로 유배가 사형당한 도정궁 13대 사손 이하전(李夏銓)의 봉제사를 지냈던 집으로 1872년 흥선헌의대원왕께서 지어줬습니다. 또 하나는 선조대왕의 서7남 인성군의 10대 종손이었던 전 국회부의장 이재형의 호를 딴 운경고택(雲耕古宅)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현대그룹의 소유로 되어 있는 도정궁 별채로 일반인들의 관람출입이 금지돼 있습니다.
<건국대학교로 이전돼 보존-유지되고 있는 도정궁 경원당[慶原堂]의 일부>
<운경고택의 정문[상]과 흥선헌의대원왕이 지어준 경원당[慶原堂, 하]>
<현대그룹 소유가 된 도정궁 별채. 어김없이 궁의 건축양식과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철근콘크리트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1920년대 서울5대 명물 중 하나였던 도정궁의 장행랑[長行廊].
누군가에게 혼나 ‘줄행랑치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됐습니다. 사진출처-더위키>
도정궁 근처에는 배화학당을 세운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 미국선교사의 집과 3.1만세운동과 이를 잔악무도하게 진압한 일본경찰의 만행과 제암리학살사건 등을 세계에 처음으로 타전-보도한 미국UPI통신 한국특파원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Bruce Taylor, 1875~1948)의 집 ‘딜쿠샤’(행복한 마음) 그리고 권율장군의 집터를 지키고 있는 420년 된 은행나무와 음악으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한 홍난파(洪蘭坡, 1897~1941)의 집이 있습니다(Cf. “여성 선교사 캠벨, 서울 사직동 사택 재개발,” 국민일보 2016-04-15).
<왼쪽부터 캠벨선교사, 테일러 특파원, 홍난파. 사진출처-기독교타임즈 & [사]난파기념사업회>
<캠벨선교사의 집>
<테일러특파원의 집 딜쿠샤, 과거와 현재의 모습>
<홍난파의 집>
<테일러특파원의 집 딜쿠샤 앞에서 42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권율장군집터 안의 은행나무>
Compiled & Written by
Dr. Young-Gwan Kim, Academic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