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왕실황실궁능 / 종묘 / 사직단 / 환구단 / 박물관

Daehan Imperial Household

어의궁(於義宮)

<파괴되기 전 종로구 내자동 201번지 일대 어의궁의 모습[선 안쪽]>

어의궁은 종로구 내자동 201번지 일대로 제16대 인조대왕이 즉위하기 전 살던 잠저이며 효종대왕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어의궁은 다른 별궁들과 다르게 상어의궁(上於義宮)과 하어의궁(下於義宮)으로 나뉘었습니다.

■상어의궁
상어의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 현재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일대에 있었습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어의궁이 ‘유지명잠룡지’(有池名潛龍池)라 하여 이곳에 잠룡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합니다. 인조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으로 태어나 쭉 아버지의 집 송현궁(훗날 저경궁)에서 살다가 훗날 인열왕후가 되는 한씨와 혼인 직후 향교동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소현세자와 효종을 낳았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이곳이 어의궁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궁되고 인조의 어휘 등을 봉안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게 됩니다. 영조32년(1756) 영조대왕이 이 곳 봉안각에 배례하고 ‘인묘고궁’(仁廟古宮)이란 현판을 걸게 한 것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상어의궁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현재는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그 위치조차 가늠하기 불가합니다.

■하어의궁

<어의궁 터 표지석>

효종대왕의 잠저입니다. 효종대왕도 아버지 인조대왕과 마찬가지로 원래 왕이 될 왕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궁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봉림대군 시절 훗날 인선왕후가 되는 장씨와 혼인 후 동부 숭교방 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연지동 일대에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참고로 이 자리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본궁으로 정현왕후 소생인 중종의 잠저이기도 했습니다.

<《인평대군 방전도》에 나온 하어의궁의 모습 >

소현세자 사망 후 봉림대군은 세자가 됐고 곧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옛 사저는 본궁이 되어 어의궁으로 불렸습니다. 이때부터 인조가 살았던 옛 어의궁은 상어의궁으로 봉림대군이 머무는 어의궁은 하어의궁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왕을 배출했다하여 ‘용흥궁’(龍興宮)으로도 불렸습니다. 숙종대왕은 이곳에 '용흥구궁‘(龍興舊宮)이란 현판을 남겼습니다.

<강화도령으로 불린 철종대왕의 사저 용흥궁의 모습>

이후 왕실의 사적재산을 조달-관리했고 왕과 왕세자가 가례를 올리는 별궁으로 기능했습니다. 가례는 인조대왕과 장렬왕후의 친영부터 시작되어 이후 숙종대왕과 인현왕후 영조대왕과 정순왕후도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습니다. 그러다 융희원년(1907) 궁내부령에 의해 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폐지하고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어의궁은공식적인 황실재산으로 통합됐습니다.

그러다 1954년 이승만이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면서 황실재산인 어의궁터는 국가로 몰수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알 수 없는 민간인에게 팔렸고 궁은 철거되어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의궁관련 현존하는 문화재는 한국은행 후문(서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 앞에 남겨져있는 하마비가 유일합니다. 1950년도까지도 어의궁 조양루(朝陽樓)와 석양루(夕陽樓) 또는 석어당이 남아있었으나 이마저도 이승만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은행 후문에 설치된 어의궁[송현궁-저경궁]안내표지석[좌]과 어의궁 하마비[우]>

<2021년 12월 현재 어의궁터에는 어김없이 대형건설사 계룡건설이 시공하는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이
증축되고 있습니다. 어의궁[저경궁]안내표지판과 하마비는 철거-이전 된 상태입니다.>

이현궁(梨峴宮)

<어의궁터에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철판안내판과 함께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들에 둘러싸여 외로이 서있습니다.>

이현궁은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연화방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31길(창경궁로와 김상옥로) 언저리에 있던 광해군의 잠저입니다. 면적이 대략 31,551㎡(9,544평)정도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광해군이 13세 되던 해인 선조10년(1587) 유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따로 독립하여 나와 살았습니다. 정착한 동네는 배 밭이 많은 걸로 유명해서 동네 이름이 ‘배오개’였는데 이를 한자로 ‘배나무 이’(梨)에 ‘고개 현’(峴)을 써서 ‘이현’(梨峴)으로 불렀습니다.

이곳에서 살던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됐고 이후 선조대왕과 함께 궁에서 살면서 이곳은 빈 집이 됐습니다. 광해군 즉위년(1608)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이현의 옛집은 왕의 잠저로 ‘이현궁’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의 사당을 두기도 했고 왕세자 이지의 혼례 때 세자빈이 친영하는 별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인조1년(1623)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하였습니다. 인조대왕은 친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친모 구씨를 연주부부인에 추존한 뒤 친모에게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을 드렸는데 이후 ‘계운궁’(啓運宮)으로 이름이 바꿨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훼손되어 인조대왕은 한동안 광해군이 지은 경덕궁을 사용했습니다. 인조대왕은 계운궁에서 지내던 모친을 경덕궁으로 모셨고 연주부부인 구씨는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훙서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동생 능원대군이 집을 잃자 이현궁을 하사하여 살게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숙종대왕 때는 능원대군의 옛집을 사서 숙의최씨의 제택으로 삼게 했습니다. 그 뒤 연잉군이 가례 후 이현궁에서 살기로 했으나 무산됐고 숙종대왕이 마련해준 창의궁에서 살게 됩니다.

숙종37년(1711) 이현궁은 왕실에서 직접 관리했습니다. 숙종44년(1718) 민회빈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1646)를 복권하면서 강빈의 옛 신주를 이현궁에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영조대왕 때는 당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이현궁을 서3녀 화평옹주에게 주려고 경복궁 옛 터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정조대왕 즉위 후 설치 된 장용위가 이현궁에 들어섰고 이후 장용영으로 승격된 뒤 규모가 커졌습니다. 그러나 순조대왕 즉위 후 장용영이 폐지됐고 이현궁 터는 훈련도감의 동쪽군영으로 사용됐습니다.

<이현궁 내 장용영 ‘본영도형’>

대한제국 기에는 동쪽군영 자리에 일본군 보병59연대 1대대가 주둔했습니다. 융희2년(1908) 부대가 용산구 병영으로 이전한 뒤 융희3년(1909) 동아연초주식회사 사택으로 대여됐고 그해에 다시 북측의 기존 가옥이 철거되어 경성재판소 관사가 신축됐습니다. 이후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로 사용되다가 1993년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국민은행 태승플래닝으로 넘어가 현재는 고층철근콘크리트 주상복합아파트 효성주얼리시티가 들어섰습니다.

이외 이현궁부지는 대부분 국가소유인데 1954년 이승만이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면서 국가로 강제 몰수된 것 입니다. 서울특별시선거연수원과 경찰공제회 그리고 혜화경찰서 등 관공서가 들어섰는데 일부는 개인에게 팔렸습니다. 개인 소유로는 종로구 인의동 28-48번지 일대 종로플레이스와 인의빌딩 등이 있습니다.

<정부가 민간부동산개발업자들에게 팔아먹어 어김없이 어의궁터에 들어선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 종로플레이스[좌]와 효성주얼리시티 주상복합아파트[우]>

<어의궁터에 자리 잡은 정부소유의 서울중부권주거복지지사[좌]와 종로구선거관리위원회[우]>

이현궁터에 남은 고목 한그루

이현궁터에는 서울특별시보호수 1-3으로 지정된 500년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중종대왕 기인 1516년부터 500년이 넘는 지금까지 쭉 같은 자리에 있어 이현궁 역사의 산 증목(證木)으로 불립니다.

<500년 넘은 이현궁 안의 이 은행나무 옆에 복동이 신당을 짓고 가무를 벌였다 합니다.>

광해군 시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 친척의 노비 복동이라는 사람이 광해군을 저주를 한 죄로 국문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여겨 복동은 도리어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해서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복동이는 이 은행나무 옆에 기도하는 신당을 설치하여 귀신을 그려놓았으며 밤낮으로 가무를 벌여 귀신을 즐겁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복동을 성인방(聖人房)으로 부르면서 조금만 의심나는 일이 생겨도 이곳에 와 점보고 수많은 재물을 바치니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