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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창성궁(昌城宮)

창성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57번지 일대에 있던 별궁으로 영조대왕의 딸 화유옹주와 부마 황인점이 살았던 곳입니다. 화유옹주는 영조대왕이 후궁 귀인조씨 사이에서 47세에 얻은 10번째 딸로 다른 딸들보다도 훨씬 귀하고 예쁘게 여겨졌습니다. 14살 되던 해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 황인점과 혼인했고 황인점은 본관인 창원의 지명을 따 창성위에 봉해졌는데 이런 이유로 창성궁의 정식이름은 ‘창성위궁’(昌城尉宮)이며 규모는 대략 4,300㎡(1,300평)이었습니다.

조선의 부마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에 부마 황인점은 영조대왕 때까지 할 일 없이 지내다가 영조52년(1776) 영조대왕께서 승하하자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애책문[哀冊文]>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화유옹주가 훙서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의 합장묘를 이장할 때 출토 된 유물들.
조선후기 왕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황인점이 청나라에서 들인 물품들도 있습니다. 사진출처-고궁박물관>

이후 정조대왕은 창성위 황인점을 매년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중국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신단)로 청나라에 보냅니다. 당시 조선은 책력을 구하기 위해 매년 선물을 듬뿍 싣고 동지사를 보내 책력을 얻어 와야 했습니다. 황인점은 여러 차례 청나라를 방문했는데 그 때문에 순조1년(1801) 신유박해 때 고초를 겪었습니다. 정조7년(1783) 황인점이 동지겸사은정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이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를 몰랐다하여 정사(正使)로서 책임을 물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황인점은 삭탈관직 됐고 그 충격으로 1년 뒤 순조2년(1802)에 사망했습니다.

<황인점의 파직에 영향을 준 조선인 최초 영세자 이승훈>

이후 황인점의 후손이 살다 창성궁은 왕실소유가 되었습니다. 특정한 주인이 없는 궁은 내명부의 소유가 되었기에 대한제국 고종황제 때 창성궁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소유가 됐습니다.

광무9년(1905)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황실재산을 국유화하려 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내정은 통감부가 담당했기에 국유화는 사실상 일제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순헌황귀비 엄씨의 양동생 엄준원이 정동에 있던 달성위궁(선조와 인빈김씨의 소생 정신옹주의 남편 서경주의 집)에서 사립학교 건립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순헌황귀비는 엄준원에게 자신의 소유인 창성궁을 하사하여 이곳에서 광무10년(1906) 여메례를 학감으로 하는 진명여학교가 개교됐습니다. 순헌황귀비와 그녀의 친정 엄씨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 외에 숙명여학교(1906, 현 숙명여자대학교)와 양정학교(1905)도 설립했습니다.

진명여학교 설립에 들었던 모든 비용은 순헌황귀비의 경선궁과 영친왕궁 소속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 전답 임야 등을 제공하여 마련됐습니다. 불과 1년 후 융희원년(1907)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재산을 국유화했으니 이때 순헌황귀비의 용단이 없었다면 창성궁은 일제의 소유가 됐을 것입니다.

<창성궁에 세워진 진명여학교 구교사[校舍]>

진명여학교는 이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진명여자보통학교로 나뉘었습니다. 진명여자보통학교는 폐교됐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51년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진명여자중학교와 진명여자고등학교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 진명여중은 1987년 폐교됐고 진명여고만이 1989년 8월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해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옛 진명여학교 자리에는 ‘창성궁터’ 또는 ‘진명여고터’라는 표지석 조차 없습니다. 진명여고가 이전되면서 회나무 아래 표지석을 만들어 놓았다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졌습니다. 오직 ‘창성동’이라는 동명과 ‘진명길’이라는 길 이름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명 변경으로 진명길은 ‘자하문로 16길’로 바뀌었습니다.

<창성궁터에 들어선 철근콘크리트 청와대부속건물. 창성궁터였음을 알리는 조선왕실 문화유적무덤표지석조차도 없습니다.>

창의궁(彰義宮)

<수선전도[1861]에 표기된 영조대왕의 잠저 창의궁>

창의궁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현재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19번지(통의동 35) 일대에 위치했던 별궁이며 영조대왕이 연잉군 시절 살던 잠저(潛邸)로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태어난 궁입니다. 말년의 숙빈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창의궁배치도. 출처-고려대학교박물관>

원래 이곳은 효종대왕의 넷째 딸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는데 숙종대왕이 이곳을 사서 넷째 아들 연잉군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숙종대왕은 건물 하나의 이름을 양성헌(養性軒, “높은 누각 넓기도 한 것이 임금수레 전에도 왔다네. 광명전 바로 저긴 것이 때때로 올라가 마음 위로 하리라”)이라 짓고 시까지 지어 현판을 걸어 아들에 대한 애정을 전했습니다. 경종1년(1721) 연잉군이 왕세자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살면서 연잉군의 사저는 근처의 ‘창의문’(彰義門) 이름을 따 ‘창의궁’(彰義宮)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조대왕은 창의궁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란 현판을 걸었는데《건구고궁 소지(小識)》에 의하면 건구(乾九)는 《주역》에서 온 말로 승천하지 않고 숨어있는 용 즉 잠룡을 뜻하며 왕이 되기 전의 자신을 투영해 쓴 것이었습니다.

<영조대왕의 친필 건구고궁 현판>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 후 한성부 좌윤 홍석보의 주청에 따라 왕의 잠저 당시 호적을 따로 떼어다 이곳에 보관했으며 후에 장보각(藏譜閣)을 짓고 영조대왕의 초상화 2본과 어필 및 서찰 등을 모시기도 했습니다. 옛 집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한 영조대왕은 어머니 사당인 육상궁을 참배한 후 종종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여기서 하룻밤 자고 온 적이 많았고 영조30년(1754) 이곳에 일찍 죽은 아들 효장세자와 손자 의소세손의 사당을 두었습니다.

<창의궁 안의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 출처-프랑스국립도서관>

정조대왕도 사도세자의 초상화를 이곳에 수용하면서 주기적으로 참배했고 가끔 머물면서 전교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순조대왕 때는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사당도 있었습니다. 고종황제 때까지 존재하다가 융희2년(1908) 일본에 의해 헐리고 그 자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서면서 창의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8.15광복 후 이승만은 창의궁터를 적산(敵産)으로 분류하여 일반에 불하했고 이후 개인주택들이 들어섰습니다.

<창의궁 터 근처의 백송. 사진출처-경향신문>

창의궁 터 내 통의동에는 백송이 있었습니다. 키는 16m였는데 한 때 한국에서 제일 오래 된 백송으로 600년이 넘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1994년 분석한 결과 1690년경에 심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백송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에서 1945년까지 거의 자라지 않았다 합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를 동반한 강한 바람에 쓰러졌습니다. 청와대와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가 쓰러진 상태에서라도 살리기로 하고 경찰3교대 근무로 배치하여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새싹이 나 살아나는 듯 했으나 못된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등 훼손하여 회생불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미신을 타파한다며 이 백송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했고 그 해 5월 13일 잘려 현재는 밑동만 남아있습니다.

<1990년 7월17일 폭우로 쓰러진 백송. 사진출처-경향신문>

<창의궁 표지석>

창의궁 근처 적선방에 영조대왕의 딸 화순옹주와 그의 남편 월성위 김한신이 살았던 월성위궁이 있었습니다. 월성위궁이 곧 창의궁이라는 설도 있으나 왕실사당으로 기능했다는 창의궁 관련 기록을 보아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김한신 일가는 창의궁은 월성위궁이라는 주장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로 김정희의 책이나 답사 등에는 통의동은 창의궁이라는 식의 설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위성사진으로 본 창의궁 터>

청와대 소유에서 홍석현의 땅이 된 창의궁터는 2012년 건축허가가 나 여지없지 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서 결국 멸실되고 말았습니다. 2012년 3월 2일 손효정 tvreport기자의 “창의궁 터, 건축허가 논란...‘역사의 가치도 이기는 돈?’”이란 제목의 보도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창의궁 터, 건축허가 논란...‘역사의 가치도 이기는 돈?’

입력 2012.03.02 11:51PM

[TV리포트 손효정 인턴기자]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곳에 건축허가가 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서울시 통의동 35번지 지하층에 건축 허가가 났다. 이곳은 조선왕실의 유물이 자주 발견되는 곳이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지하층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돌 몇 개가 발굴된 곳도 현장 보존 결정이 내려졌는데 창의궁의 경계가 되는 곳이 허가가 난 것이다.

이에 심의과정에 대한 의심이 제기됐다. 알고 보니 심의에 참여한 문화재청 심의위원 4명 중 한명은 전공자가 아니었다. 또 한 위원은 땅 소유주 친척 업체의 문화재 발굴사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벌기업이 소유한 이 땅에는 재벌 총수 부인들이 활동하는 문화유산 보존단체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에 누리꾼은 “재벌이면 다냐!” “그 문제의 재벌이 어디인가?”
“역사가 있어야 현재도 있는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허가다”
“돈이면 다 되는 것인가요?” “역사 보존이 먼저다” “왜 이런 횡패를 부리는지” “역사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KBS뉴스화면 캡처

손효정 인턴기자 shj2012@tvreport.co.kr

2012년 3월 3일 KBS뉴스에서는 ‘창의궁터’ 지하층공사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보도했습니다:

재벌 소유 ‘창의궁 터’ 지하층 공사 허가 논란

입력 2012.03.03 (09:55)
수정 2012.03.03 (16:03)

<앵커 멘트>
경복궁 옆에 있었다는 영조가 살았던 창의궁 터를 아십니까?파기만 하면 유물이 쏟아져
웬만해선 지하층 건설허가가 나지 않는데, 유물이 발굴되고도 지하층 공사가 허가된
곳이 있습니다.

심의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은데다 건물터가 재벌 터여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송수진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통의동 35번지.조금만 파내려 가도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입니다.그래서 웬만해선 지하층 건축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녹취> 신축 건물주(음성변조) : "유물이 좀 있어서 지하를 못 팠어요. 공간 확보를 못 하니까 일단 손해죠."

창의궁 유적이 발굴된 5곳 가운데 다른 한 곳입니다.회의록에도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데다 다양한 유물까지 발굴됐다고 나와있습니다.그런데도 최근 유일하게 지하층 건축 허가가 났습니다.

한 곳은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돌 몇 개가 발굴돼 현장 보존 결정이 내려졌는데 창의궁의 경계를 알 수 있는 담장 형태까지 남은 이곳은 허가가 난 겁니다.

<녹취>
문화재청 심의 위원(음성변조) : "저는 문화재청의 요구를 받아서 간 사람이고 (허가 이유는) 문화재청에 확인을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심의에 참여한 위원 4명 중 한 명은 전공자가 아니고, 한 위원은 땅 소유주 친척 업체의 문화재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녹취>
문화재청 관계자(음성변조) : "저도 그 회의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그 (허가)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거죠."

한 재벌 언론사 회장이 소유한 이 땅에는 재벌 총수 부인들이 활동하는 문화유산 보존단체 건물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KBS 뉴스 송수진입니다.

2012년 5월 21일 시사뉴스 김신애 기자는 당시 상황의 문제점을 자세히 심층 보도했습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신애 기자)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통의동은 효자동, 통인동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이 남아 있다. 특히 통의동 35번지와 그 일대는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 터로, 땅 아래에는 조선왕조 유물이 가득해 좀처럼 지하층 공사가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최근 통의동 일대에 지하층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설 건물은 문화재유산 보존단체인 ‘아름지기’ 사옥이다. 아름지기의 대표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 신연균씨. 해당 부지 역시 홍석현 회장 소유지이다. 바로 조선왕조의 역사가 기린 창의궁 터에 이례적인 지하층 공사가 허용된 이유로 의심되는 부분이다.

<창의궁 터에 이례적 지하층 공사>

▲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뉴시스

서울 통의동 35-32번지, 이곳은 최근 문제가 됐던 홍석현 회장과 청와대의 ‘땅 교환’에서 홍 회장이 청와대로부터 받은 땅이다. 청와대는 당초 홍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삼청동 땅 1544㎡(468평)과 건평294㎡(89평) 규모의 집을 소유하는 대신 홍 회장에게 통의동 땅 613.5㎡(186평)을 제공했다. 청와대 측은 청와대와 근접한 삼청동 부지와 집을 경호 등의 문제로 매입했다고 밝혔다.하지만 삼청동의 땅과 집은 홍 회장이 자산관리공사 공매에서 40억1000만 원에 매입했던 것이고, 청와대가 홍 회장에게 제공한 통의동 부지의 시세는 65억~93억 원 수준이어서 문제시 된 바 있다. 또 청와대는 홍 회장이 이 집을 매입해 리모델링하는 사실을 미리 알았음에도 늑장 대응으로 리모델링 비용 등 추가 매입비용을 허비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통의통 35-32번지 창의궁 터는 이러한 범상치 않은 과정을 통해 2011년 2월11일 홍 회장의 소유가 됐다. 이후 발굴조사와 매장문화재 검토회의 등을 거쳐 지하층 신축 허가를 받았고, 올 3월부터 아름지기 신축공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이 일대가 사실상 지하층 공사 허가가 나지 않던 곳이라는 것.

지난 2008년에도 현장에서 100m가량 떨어진 통의동 35번지 일대에 몇몇 건축주가 건물구조변경 신청을 했다. 이 곳들은 아름지기 공사터보다 경복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발굴조사에서 창의궁터 유구가 발견, 건물은 지상공사만 진행됐다. 당시 건물구조변경 신청을 했던 한 건축주는 “뭐가 많이 나와서 다시 덮고 위로 건물을 올렸다”며 “이 근방은 다른 곳들도 다 못하게 돼 있다. 지금저곳(창의궁 터)만 지층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 근방 음식점과 갤러리 등 건물주와 관계자들을 만나본 결과 모두 지층의 유구ㆍ유물 발견으로 지하층 공사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5년간 통의동 일대에서 지하층 신축허가 신청이 있던 곳은 4곳, 그 중 유구ㆍ유물가 발견되지 않은 1곳을 제외하면 아름지기 공사터만 유일하게 지하층 공사가 허용된 것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2008년 당시 발굴조사가 진행된 현장에도 가 봤지만 아름지기 공사터는 그보다 유적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름지기 공사터만 지하 공사가 허용된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대기업에 대한 특혜”라고 지적했다.

▲ 지난 3월 아름지기 터 발굴 현장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펜스나 어떤 표시도 없이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었다. 아름지기 공사터의 발굴조사와 문화재 평가는 지난해 12월 끝난 바 있어 무려 3개월간을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왼쪽 위가 방치된 공사터 입구다. ⓒ시사오늘

<문화재 평가, 신뢰해도 될까>
아름지기 공사터의 지하층 공사 허가 과정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아름지기 공사터는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굴된 문화재에 대해 세 차례의 전문가 검토회의와 문화재 평가회의를 거쳐 ‘지하 유구를 일부 복원ㆍ이전 하라’는 문화재청의 조치 방안이 떨어졌다.

아름지기 공사터에서는 일제강점기 건물지 유구ㆍ유물과 함께 조선중ㆍ후기 건물지 유구가 발굴됐다. 또 도기호, 백자호, 백자병 등의 유물도 함께 나왔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의 매장문화재의 검토 회의록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조사지역은 창의궁 영역으로 추정”된다며 “부속되어 종사하는 중인이나 서인 정도가 사용한 공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3차 회의에서는 “창의궁 영역으로 추정되나, 건물지의 상부가 많이 교란ㆍ훼손되고 중복이 심해 정확한 구조와 성격이 파악되지 않는다”며 “현지보존의 경우보다 일정부분(담장부)을 이전 활용하는 방안이 바람직 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해당 전문가들의 심의 결과를 반영, 담장 유구를 건물 외부에 이전 복원하고 담장의 흔적을 표식화하는 방안을 취하기로 했다. 사실상 홍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 발굴된 유구 등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기도 화성의 한 창고에 보관중이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바로 발굴 유적을 검토한 전문가들이다. 3번의 검토회의와 평가회의에는 모두 4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Y대학 문화재대학원 A교수(고고학), K대학 건축대학원 B교수(근대건축), 발굴회사 소속 전문가 C씨와 D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발굴회사 소속 전문가들은 유적을 평가하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관례다. 영리목적의 기업 관계자가 참여할 경우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C씨가 속해 있는 한울문화재연구원은 아름지기 공사터의 문화재 검토시기인 지난해 말, 중앙일보사와 친인척 관계인 삼성그룹의 계열사 공사에서 발굴 수주를 받기 위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사동 초입 옛 민자당사 부지(광훈동 155-2)에 삼성화재가 진행 중인 공사에서 한울문화재연구원은 현재 발굴기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 지난 3월 아름지기 공사터 발굴 현장이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다.(위) 아래사진은  한 켠으로 몰아 논 도자기 편과 기와 편들, 방치된 유물ㆍ유구의 사진 ⓒ시사오늘

이밖에 심의위원으로 참여한 B교수는 아름지기에서 강의를 하며 자문을 해주는 등 아름지기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기도 하다. 문화재청에서 선정하는 심의위원들이 홍석현 회장 측과 묘하게 엮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부 기업(삼성화재)과 발굴기업(한울문화재연구원) 수주 등 문제가 있지만 수주 건은 그(평가) 이후 발생한 문제”라며 “발굴회사가 영리목적으로 하는 만큼 유물평가에서 상피기관이라 판단될 수 있지만, 전문가 선정은 규정에 따랐고 법에 저촉되는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관계자의 말과 달리 삼성화재의 발굴허가는 올 2월에 났고, 지난해 말은 발굴회사들이 수주를 위해 영업활동을 하던 시기다. 발굴허가가 있기 불과 며칠 전부터 섭외활동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문화재청 관계자의 말은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유적지 파헤치고 ‘문화재 보존단체’ 아름지기 신축>
허가를 내준 곳은 종로구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로구청 관계자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문화재청의 통보를 수렴, 허가를 내렸다”며 “문화재청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 지난 2일 아름지기 터 공사현장에 적혀있는 공사 개요에는 공사명, 설계자, 시공사 등 모든 사항이 기재돼 있지만 건축주의 이름은 지워져 있다. 건축주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다. ⓒ시사오늘

이에 황평우 소장은 “문화재청은 공정하고 명확한 조사를 했어야 했고, 종로구청은 문화재청의 허가 이후에도 다른 시민들은 허가를 못 받고 아름지기 공사터만 허가받은 것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문화재청에 요구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옛 조선왕조의 창의궁 터에 새로 세워질 문화재유산 보존단체 아름지기. ‘문화재 보존단체’라기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홍석현 회장의 부인 신연균 씨가 대표로 있는 아름지기는 2008년 운영위원회 임원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 리움 미술관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 ‘삼성가 여인’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 현재는 운영위원회 구성을 공개하지 않는 상태다.

문화계에서는 이 단체가 실질적인 문화재 보존단체라기보다 삼성가 부인들의 친목단체 정도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창의궁터의 보존보다 사옥 건립을 위한 이전 복원을 택한 것도 곱게 보이지는 않을 터. 한 문화계 인사는 “귀족부인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사교모임일 뿐”이라며 “유구를 옮겨가면서 그 자리에 건물을 짓겠다는 것이 도대체 단체 설립 취지에 맞기는 하냐”고 비판했다.

출처 : 시사오늘(시사ON)(http://www.sisaon.co.kr)

2018년 1월 16일에는 명성황후의 도장으로 추정되는 내인교(內敎印) 2점이 창의궁터에서 발굴됐습니다.

<2018년 창의궁터에서 출토된 소내교인[좌]과 내교인[우]>

<창의궁터에서 발굴된 도자기와 기왓장>

이렇게 우리 모두의 소중한 조선왕실유적 창의궁터는 천민졸부재벌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멸실됐습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는 여지없이 재벌일가가 시공한 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