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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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자수궁(慈壽宮)

<현재 자수궁 터. 사진출처-더위키>

자수궁은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68(옥인동 45-1)일대에 있던 조선의 별궁으로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습니다. 그러다가 문종대왕이 옛 무안대군 집을 수리하고 세종대왕의 후궁들을 옮겨 살게 했습니다. 이후 선대왕들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으며 성종대왕 때 세조대왕의 후궁 근빈박씨가 머물면서 잠시 이름이 창수궁(昌壽宮)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외에도 폐비윤씨와 단경왕후도 폐출된 후 한동안 머물렀고 인종대왕의 후궁 정씨도 살았습니다.

후궁들은 당연히 재혼을 할 수 없었기에 자수궁에 들어온 후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가 되어 살았습니다. 불교가 잠시 권력층과 가깝던 명종대왕 때에는 이곳에 종각과 나한전이 들어섰는데 나한전은 절에서 아라한과(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를 얻은 성자를 봉안하는 곳으로 이로 인해 아무리 후궁출신 비구니들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왕실 사람이 머무는 곳에 불교건물이 생긴다며 반발이 많았다 합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이곳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쫓겨나 자수궁은 폐궁 되어 ‘자수원’(慈壽院)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공간’이 됐고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 합니다. 명나라 황실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옛 자수궁 자재로 세운 성균관 비천당. 지금 건물은 6.25 때 불탄 것을 1988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이후 비구니들의 폐단이 심하다는 부제학 유계의 상소를 계기로 현종2년(1661) 자수원은 폐지됐습니다. 이 자리에 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고 현종4년(1663)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그리고 벽입재(闢入齋)를 세웠습니다.

<[경성부사]에 실린 자수궁교. 사진출처-더위키>

경복궁에서 자수궁 가는 길에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백운동천(白雲洞川)에 ‘자수궁교’(慈壽宮橋) 돌다리를 세웠습니다. 1927년 일제강점기 백운동천 암거공사를 하며 아예 없어졌습니다. 줄여서 ‘자수교’(慈壽橋), ‘자교’(慈橋)라 불렸는데 이런 이유로 근처 교회이름도 이 다리 때문에 ‘자교교회’가 됐습니다.

<캠벨선교사는 배화학당을 세우고 전도부인 7명 자원봉사전도부인 6명과 함께 자교교회와 종교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캠벨선교사가 세운 배화학당 기도실에서는
정기적인 예배가 드려졌는데, 정춘추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이전하여 종교교회가 되었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으로 루이스워커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교회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2개 교회로 갈리게 된 것은 ‘계층간 문제’였습니다. 종교교회로 이전한
부류들은 대부분 양반이었고, 고간동 잔류 교인들의 대부분은 서민층 교인들이었습니다. 1912년 지금의 창성동 ‘내시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후 새 예배당은 남감리회가 ‘선교 100주년 기금’ 중 일부를 건축비로 보내 1922년 40평 규모의 아담한 현재의 벽돌예배당을 봉헌했습니다. 이로써 자교교회는 자하문
아래 인왕산 골짜기 마을 ‘자하골’의 자수궁 다리, 즉 자수교 아래 자리를 잡았다하여 ‘자교교회’로 불리게 됐습니다.>

죽동궁(竹洞宮)

<죽동궁 터 표지판. 다른 표지석과는 달리 식당을 내기 위해 지하를 판 입구 앞 유리판벽돌 안에 있습니다.>

죽동궁은 한성부 중부 관훈동 198번지 18호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길 38 관훈빌딩 앞에 있던 궁으로 순화궁과 바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조선후기 순조대왕의 큰딸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부마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김상용의 8대손이자 김좌진 장군의 친형 김경진의 양증조부)이 거주했던 궁입니다.

원래 이름은 ‘죽도궁’(竹刀宮)이었습니다. 김현근이 큰 병에 걸렸을 때 무당들이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면서 대나무 칼춤을 추었고 다행히 김현근이 완치된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나중에 죽동궁으로 변했으며 동 이름도 ‘죽동’(竹洞)이 됐습니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이 한 때 살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죽동궁터에는 여지없이 무지막지한 고층철근콘크리트빌딩이 들어섰습니다.

준수방(俊秀坊)

준수방은 조선왕국의 성군이시며 세계적으로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문자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1418~1450)께서 탄생하신 장의동(藏義洞) 태종대왕의 잠저입니다. 장의동잠저는 현재 멸실됐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준수방인 장의동잠저는 창의궁과 창성궁 그리고 자수궁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종대왕 탄신지 준수방 추정영역. 출처-박희용, “세종 임금님, 준수방에서 탄강하시다,”
『세종대왕탄신기념관 조성을 위한 국회정책토론자료집』 [2019년 3월11일], 64.>

창의궁 창성궁 자수궁이 현재 남아 있었다면 준수방의 원형복원을 통한 ‘한글역사홍보관’ 또는 ‘세종대왕탄신기념관’을 만들어 역사교육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까지 남아있던 창의궁 창성궁 터들은 청와대에 의해 천민재벌들에게 매도됐고 그 역사의 성지에는 여지없이 임대료수익을 노린 네모 반 듯 천편일률적인 철근콘크리트빌딩들이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지하유구흔적들도 지하주차장을 내면서 모두 멸실되고 말았습니다.

<세종대왕 탄신지로 추정되는 창의궁 창성궁 자수궁 주변 창성동 100번지 일대>

이는 왜정시대 때의 일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천민재벌졸부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대한민국청와대와 대한민국재벌들에 의해 저질러진 문화말살 만행들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탄신지를 알리는 역사문화무덤표지석. 1년 365일 비바람이 치고 먼지와 온갖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길거리 가장자리 한 모퉁이에 놓여있습니다.
나이어린 남자여자연예인들을 내세워 K-Pop이니 한류니 하며 한국문화유행의 우수성을 떠들고 있습니다. 정작 원류문화의 역사를 제대로 원형복원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난 5년간 세종대왕탄신기념관 조성을 위한 국회정책토론회가 진행됐지만 아직까지 진척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정부가 황실의
재산을 강탈하여 민간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조선왕실궁지들을 민간에 불하하고 팔아버렸는데 현재 천문학적인 지가 상승으로 그 토지보상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조선왕실문화유적들은 철근콘크리트빌딩부동산에 매몰되어 원형복원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이것이 천민졸부재벌자본주의의 폐해요 부작용인 것입니다.>

<창성동 청운동 효자동일대 주민들은 세종대왕께서 탄강하신 마을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세종마을’이라는 별칭도 달았습니다. 그리고 네온사인형광판에 간략한
국문영문안내표지판을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이 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