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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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창경궁(昌慶宮)

<창경궁 전경. 사진출처-문화유산채널>

창경궁은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번지에 위치한 5대 궁궐 중의 하나로 1483년 성종대왕 때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건축됐습니다. 창덕궁 바로 옆이고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숙종대왕 때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이 처형됐고 영조대왕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했고 정조대왕께서 독살음모논란으로 승하하시는 등 크고 작은 궁중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친일역적매국노였던 이완용과 일제통감부 이토는 1908년 4월부터 시작하여 1년 6개월 동안 순종융희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며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과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여 궁 안에 일본식건물들을 세웠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했습니다.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권위를 훼손해 국권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500년 이어온 왕실-황실역사와 민족의 맥을 아예 끊기 위해 역적매국노 이완용과 일본은 창경궁과 종묘사이에 지형을 바꾸어 신작로를 만들어 왜구름다리를 설치했고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마구 심는 등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창경궁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들은 허물어졌고 전각의 문이나 기와 등은 해체돼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순종융희황제는 이 악행을 보다 못해 공사의 중단을 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Cf. “108년 전 오늘, 창경궁은 동물원이 됐다: 창경궁 치욕의 역사 총정리,” 한겨레 2017-11-01).

<역적매국노 이완용과 일본이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맥을 끊을 목적으로 창경궁과 종묘 사이 신작로를 만들어 그 사이에 설치한 왜구름다리>

해방 후 이승만정부는 궁의 원형을 복원하기는커녕 일반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놀러 와서 유원지로 사용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서울시내 뿐만 아니라 전국의 초중고학생 소풍 수학여행 장소로 효도관광코스로 사용됐는데 돗자리를 깔고 벌건 대낮 술판을 벌이며 서로 싸우는 일들이 파다했습니다. 1981년 정부의 복원계획이 결정되면서 1983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고 창경궁 본래의 이름도 되찾게 됐습니다.

<1960년 대 창경궁의 모습. 술판이 벌어지고 코끼리 기린들이 똥오줌을 싸며 창경궁은 온갖 악취와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당시 한국국민들은 일제에 의한 우리황실의 역사왜곡과 훼손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했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진출처-서울역사박물관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