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고종광무태황제(高宗光武太皇帝, 1852~1919)

<고종광무태황제의 어진. 출처-고궁박물관>

황태자 이 원 전하의 증조부 되시는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조선왕국의 제26대왕(1864~1897)이시며 대한제국의 태황제(1897~1907)십니다. 500년 제후국을 청산하시고 1897년 10월 12일 자주독립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1897년 명성태황후 장례식 후 조선개국 505년에 촬영 된 상복차림의 고종황제어진입니다.
2018년 황태자 이 원 전하께서 알렌박사후손 Ruth Zimmerman여사로부터 환수 받은 유물로 비장한 모습의 고종황제의 상복차림어진은 국내외에서 유일한 사진유물입니다. 출처-대한황실문화원 알렌컬렉션>

당시 선교사들과 외교사절들이 고종광무태황제의 교양과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Cf. 백성호, “대한제국은 무기력하지 않았고, 고종은 무능한 황제가 아니었다,” 중앙일보 2017-10-11) 남아있을 정도로 ‘계명절대군주’이자 ‘개명개혁군주’(開明改革君主)이신 고종광무태황제의 주요 치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문호개방 및 종교개혁

가장 대표적인 치적으로는 조선왕국 500년간의 정치-종교 통치이념인 숭유억불정책을 탈피하셨습니다. 외교강화를 위해 과감한 문호개방과 함께 서구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셨습니다. 특히 1875년 운요호사건 이후 쇄국정책을 탈피하셨고 1884년 7월 3일 미국감리교선교부 파송 로버트 S. 맥크레이 목사에게 선교를 윤허하시면서 개신교선교사들을 우호적으로 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신들로 임명하셨습니다.

<이화문보검과 함께 페르시안 제복차림을 하신 고종광무태황제>

이렇게 개신교회들은 고종황제 페하의 보호 하에 감리교를 선두로 장로교, 침례회 등 형제 개신교교단들이 조선백성들을 위한 구원-구호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 할 수 있게 됐습니다 (Cf. 이길극,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을 건립,” KMCNEWS 2017-02-05).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고종황제의 독립구국운동과 3.1만세운동100주년을 기념하여 건축 준비 중인 ‘고종황제기념예배당’ 100분의1축소 실제모형>

2. 한글의 나랏말 법령화와 신분제철폐

신앙과 전도의 자유를 확보한 외국 개신교선교사들은 교육-의료-사회사업을 확장했는데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지 449년 만에 고종황제께서 한글을 국문(나랏글)으로 하는 1894년 갑오개혁을 법령화하면서 선교사들은 한글성경과 한글찬송가 보급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조선백성들의 문맹률은 급격히 감소됐고 동시에 갑오개혁의 주요 추진내용 중의 하나인 신분차별타파도 자연스럽게 힘을 받게 됐습니다.

이를 증거 하듯 <조선왕조실록>33권 고종32년 2월2일 갑진(1895년) 첫 번째에 국한문혼용 <교육강령조서반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나라를 굳건히 하기가 매우 어렵다. 세상 형편을 돌아보면 부유하고 강성하여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백성들의 지식이 개명하고 지식이 개명함은 교육이 잘됨으로서 말미암은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나라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이제 짐은 교육하는 강령을 제시하여 허명을 제거하고 실용을 높인다. 덕양(德陽)은 오륜의 행실을 닦아 풍속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지 말며, 풍속과 교화를 세워 인간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다. 체양(體養)은 동작에는 일정함이 있어서 부지런함을 위주로 하고 안일을 탐내지 말며 고난을 피하지 말아서 너의 근육을 튼튼히 하며 너의 뼈를 건장하게 하여 병이 없이 건장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지양(智養)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서 지식을 지극히 하고 도리를 궁리하는 데서 본성을 다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고 그르며 짧은데 대하여 나와 너의 구별을 두지 말고 상세히 연구하고 널리 통달하여 한 개인의 사욕을 꾀하지 말며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라. 이 세 가지가 교육하는 강령이다. 짐이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중략.

3. 교육개혁

위와 같이 백성들의 계몽을 위한 고종광무태황제의 교육철학은 <덕-체-지>3양론(三養論)이었습니다. 이는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가 창안한 것으로 18-19세기 미국 중등교육과정에서 널리 활용됐습니다. 과거 초중고교과서에 실렸던 <국민교육헌장>도 고종광무태황제의 3양교육론에서 기인된 것이었습니다(Cf. 이태진,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 2019]).

이와 같이 개신교우선정책과 함께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근대교육의 토대를 확립하셨습니다. 고아원, 신학교, 교회, 수녀원, 그리고 동대문보구여관, 정동시병원, 광혜원과 같은 병원들의 설립을 허가하셨는데 이런 기관들의 운영을 위한 교육기관들의 설립허가 역시 자연스런 것 이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윤허 하에 황실내탕금으로 설립 허가된 황실관련 교육기관들은 광혜원(1885, 현 세브란스병원-연세대학교),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 경신학교(1886), 정신여학교(1887), 영화여학교(1892), 광성학교(1894), 숭덕학교(1894), 정의여학교(1894), 일신여학교(1895), 정진학교(1896), 공옥학교(1897), 숭실학교(1897),
신군학교(1897), 배회여학교(1898), 맹아학교(1898), 장로회신학교(1901), 숭의여학교(1903), 원산여학교(1903), 정명여학교(1904), 덕명학교(1904), 호수돈여학교(1904),
진성여학교(1904), 의창학교(1905), 영명학교(1906), 계성학교(1906), 신성학교(1906), 보성여학교(1906), 의명학교(1906), 한영서원(1906), 미리흠학교(1906),
약현학교(1907), 수피아여학교(1907), 신명여학교(1907), 기전여학교(1907), 신흥학교(1908), 창신학교(1908), 의정학교(1909) 등입니다.

이렇게 황실내탕금으로 설립된 수많은 근대교육기관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 교육수준은 세계 최고라 자랑할 수 있습니다.

4. 문화개혁

종로의 단성사 서울극장 피카다리극장 등은 고종광무태황제의 적극적인 근대공연지원정책으로 탄생된 영화관들이었습니다. 김기란 저 『극장국가 대한제국』(서울: 현실문화, 2020)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김기란 저 극장국가 대한제국 표지>

5. 한글문학장려

고종황제의 한글나랏말 법령화 및 한글사용 장려로 대한제국 시기 한글을 통한 근대식 창작소설들의 출판이 줄을 이었습니다.

6. 근대스포츠도입

근대스포츠 장려와 함께 야구팀과 축구팀을 설립하셨습니다. 이와 더불어 골프장도 설치하셨습니다.

7. 민주언론도입

독립신문과 같은 근대민주언론을 창간하셨고 독립협회와 같은 민간주도 민주협의체의 도입도 장려하셨습니다.

8. 철도설치

1896년 7월 15일 칙령 제31호 ‘국내철도규칙’을 반포하셨는데 이는 “국내 인민들의 왕래와 물품출입의 편리를 위해 국내 각 지방에 철도를 설치”하신 것이었습니다(칙령 제31호 제1조). 1897년 경인철도 제1차 기공식을 시작으로 호남선 경부선 등이 설치됐는데 이는 단순히 국내1일 생활권이 가능한 시설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까지 연결해 대한제국의 경제무역지평을 세계화하려 하셨던 고종광무태황제의 거국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고종광무태황제의 국내철도규칙 반포를 기록한 고종실록 34권>

9. 자주독립외교강화

1896년 11월 독립문 설치와 함께 대내외에 조선의 자주독립외교를 강화하시면서 각국에 통신원들을 파견하여 세계 각국들과의 교류에 물고를 트셨습니다.

<1898년 촬영된 독립문[상]과 1890년대 촬영된 영은문[하]. 영은문 사진은 2018년 황태자 이 원 전하께서 알렌박사의 외증손녀 Geraldine T. Nijakowski여사로부터 기증받아 환수된 알렌컬렉션 중의 하나로 2018년 11월 미래 꿈나무들의 역사교육을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셨습니다. 출처-대한황실문화원 알렌컬렉션>

10. 도시근대화주도

근대도시개조사업과 함께 미국 워싱턴D.C.를 모델로 한 한성부(서울시청) 설립과 함께 한성 곳곳에 측량도로원표도 설치하셨습니다. 종로의 탑골공원은 워싱턴 Purlie Park를 본 딴 근대식 시민공원이었습니다. 용산에 한성전기회사 및 용산발전소를 설치하셨고 1895년 종로거리에 전등설치를 시작으로 서울전역에 전기를 보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895년~1897년 사이 고종황제의 도시가로개혁정비정책의 일환으로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에 의해 조성된 탑골공원.
초기 탑골공원은 대한제국황실양악대 연주회장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팔각정에서 시민들의 여가를 위한 근대음악이 연주됐습니다.>

1899년 5월4일 종로거리에 전차를 개통하셨는데 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전차개통이었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올 정도로 종로거리의 전차와 가로등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었습니다. 전차의 지속적인 보급을 위해 1900년 2월과 5월에 광성상업학교와 철도학교를 개교하셨고, 1900년 12월 낙영학교에 공업전수과와 철도과를 설치 하여 개교하셨습니다.

<동아시아 최초의 전차개통식[좌]과 당시 쇠당나귀로 불렸던 전차가 종로거리를 지나는 모습[우]>

11. 정치관제개혁

관제개혁과 함께 평등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이는 천민관직기용의 용이성을 위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개혁으로 보부상 천민출신 이용익(1854~1907)은 고종황제에 의해 궁내부 내장원경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에 입각한 의회를 설립하셨고 궁내부를 개편하여 능력위주의 실학적인 신흥관료조직을 구축하셨습니다. 또한 경무청을 설립하여 근대경찰제도를 도입하셨고 우체부를 설립하여 근대우편제도를 시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로의 좁은 골목길에서도 화재를 방재할 수 있는 최첨단 근대식소방시스템도 도입하셨습니다.

12. 군사개혁

러시아 식 근대군제개편을 단행하셨습니다. 1893년 조선 역사상 최초로 해군사관학교를 개교하셨고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해군함을 수입하셨습니다. 1898년 대한제국법령 조칙5권으로 육해군 친총(임금이 직접 관할)을 천명하셨고, 1899년 육해군 총괄 원수부도 창설하셨습니다. 이러한 근대식 군사제도혁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식 군사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러한 군사개혁으로 항일독립투쟁 당시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독립군들의 굳건한 구심점이 되셨습니다.

13. 경제개혁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식산흥업정책(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을 실시하셨는데 이로 인해 1894년 5개에 불과했던 사기업 수는 대한제국 기 중엽 1904년에는 40배인 222개로 증대됐습니다. 1890년 근대식은행 즉 민간자본은행인 대한천일은행도 설립하셨는데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3대 은행 중의 하나인 우리은행입니다. 은행설립의 기초 자본금은 고종광무태황제의 내탕금이었고 제2대 은행장은 이 은 의민황태자셨습니다.

<1899년 고종광무태황제의 황실내탕금으로 설립된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자본은행이며 대한제국 자유시장경제체제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국립상업학교도 설립하셨는데 용산에 위치한 선린상업고등학교가 가장 대표적인 상업학교입니다. 이와 더불어 근대화폐제도 도입, 보험회사 설립, 광산 및 공업전습소 설립 등 공업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알렌박사의 수집품인 선글라스를 쓰신 고종광무태황제의 사진. 출처-연세의대 동은의학박물관>

14. 독도주권 세계공표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칙령 제41호를 반포하시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하셨습니다. 고종광무태황제 이전 조선조정은 울릉도에 대해 수토 (搜討)정책을 취했습니다. 수토정책은 울릉도에 민간인 거주를 금지하고 관리를 주기적으로 파견해 순찰하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1883년 수토정책을 폐기, 주민들을 울릉도에 이주시켜 개발하는 “울릉도개척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불법수탈을 일삼는 일본인들에 대한 경계령과 함께 대한제국의 영토를 수호하시기 위한 과감한 정책이었습니다(Cf. “고종황제, 칙서에서 독도 주권 선포,” 아틀라스뉴스, 2019-03-31; “고종, ‘독도는 대한제국 땅’ 세계 공표, 연합뉴스, 2015-10-21).

15. 평양천도와 중국정벌 그리고 미군20만 원병 구상

광무6년(1902)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하는 천도계획을 구상하셨습니다. 평양천도의 목적은 중국을 정벌하여 간도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에 20만 원병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평양천도를 위해 풍경궁(豊慶宮)을 건설하셨고 이 궁에 고종광무태황제와 순종황태자의 어진을 봉안하셨습니다.
따라서 평양천도의 주된 목적은 대한제국 선포 후 500년 제후국의 한계를 벗어나 중국을 견제하고 평양을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제2의 수도로 삼아 동북아시아에서의 경제- 군사적 패권을 거머쥐어 미래 세대들이 부국강병한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한 비전이셨습니다(Cf. 이범진,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동서양 가치 융합으로 위기 극복 추구...선교사들 ‘동양의 예루살렘 될 것,” 뉴스파워, 2009-07-18; 김윤구,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2009-07-17).

16. 외교정책혁신

고종광무태황제의 가장 큰 치적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500년 제후국에서 벗어나 1897년 자주 독립국이며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신 일입니다.
또한 1904년 1월 중립국을 선언하셨고, 1905년 7월에 이루어진 ‘가쓰라-테프트 조약’과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시도하셨습니다. 61명 이상의 해외밀사첩보통신원과 정보요원들을 파견하셨는데 이는 각국의 동향을 파악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홍보하기 위한 시도셨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07년 6월 16일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특파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17. 항일독립투쟁주도

이상설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광복군의 설립을 전폭적으로 재정지원하셨고, 황실복벽파(復辟派) 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항일독립투쟁을 주도하셨습니다. 1914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대한광복군과 우당 이회영을 통해 해외망명 및 망명정부 설립도 시도하셨습니다.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 계셨던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이완용과 같은 친일역적매국노들에 의해 결국 1919년 1월 21일 독살되셨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비폭력항일독립투쟁이 된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19년 2월 28일 고종광무태황제의 국장 예행연습 때 서울 광화문통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덕수궁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의 모습>

18. 대한민국의 모체구축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 그리고 공화국으로의 국체 변화 시도에 적극적이셨는데 결국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선포하신 대한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와 경제체제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2017년 서울역사박물관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 사진전 홍보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