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이우왕자(李鍝王子, 1912~1945)

<금관조복 차림의 이우왕자>

출생과 운현궁 승계

이우왕자께서는 이 원 황태자 전하의 당숙으로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 사동궁에서 의친왕 차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생모는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십니다. 흥선헌의대원왕의 장손 이준용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1917년 3월 22일 덕수궁 황실회의에서 고종황제께서는 이우왕자를 이준용의 양자로 지명하셨습니다.

5월 28일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된 이우왕자는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받으셨습니다. 같은 날 다이쇼일왕의 특지가 일본궁내성 고시 제8호에 이우왕자의 입적을 발표하였고 8월 4일에는 재산관리와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공비 광산김씨(光山金氏)와 이왕직장관이 선임됐습니다.

이준용은 1912년 사망한 부친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갖았기 때문에 이우왕자께서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되면서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셨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황족은 의친왕 이강과 이우왕자 뿐이었습니다.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고 평했습니다.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차게 보인다”고 평했습니다.

<1917년 이준용의 장례식[좌]. 운현궁 청년시절[우]>

일본볼모유학 및 군생활

1922년 숙부 의민황태자와 같이 유학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습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융희황제 장례식 때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됐습니다. 한일병탄 이후 대한제국황실의 규율을 위해 1926년 12월 1일 일본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기 때문에 이우왕자께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929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도 이우왕자께서는 항일정신이 투철했고 부왕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에 협력했으며 여러모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마음가짐을 굳게 하셨습니다. 육군사관학교 동기 일본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노래도 했고 조선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운현궁 가정교사 가네코도 이를 증언했습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했다.”

<일본유학시절과 군복무시절>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사회부기자로 활약한 김을한도 “이건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라는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의 말을 언급하며, “일본인 사무관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우가 그만큼 영특하다는 반증이므로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라고 평하였습니다(Cf. 김을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영친왕비께서도 “이우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 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평하셨습니다.

일본유학시절 고국이 그리울 때면 ‘황성옛터’를 부르며 외로움을 달랬다 합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우왕자께서 잠시 서울에 머물 때 전라도 농부들이 탄원한 내용입니다. 일본군이 호남평야 곡창지대에 작전로를 내면서 보상도 없이 땅을 착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우왕자께서는 분노하여 용산일본군사령부로 달려가 도로공사를 취소하라 했는데 거절되자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위협했더니 도로공사가 중지되어 농민들의 탄원이 이루어졌다 합니다.

교육사업

1938년경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이 이우왕자께 운현궁교육사업을 위해 이우왕자의 소유 경성부 서대문구 죽첨정 일대(현 강북삼성병원 영안실 부지) 부동산의 하사를 요청했는데 이우왕자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1940년 10월 10일 황신덕은 이곳에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추계예술대학)을 설립했고 이와 같은 인연으로 광복 이후 1950년 4월 28일 이우왕자의 부인 박찬주가 재단법인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이우왕자께서 하사하신 토지에 설립된 경성가정여숙. 현 추계예술대학교>

결혼과 항일독립투쟁

의민황태자 그리고 덕혜옹주와 같이 일본은 이우왕자에게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쓰구의 딸과의 정략결혼을 강요했습니다.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라 일본왕의 칙허를 받아야 했지만 이우왕자는 1935년 부왕 의친왕과 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와 결혼하셨습니다.

원래는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딸과 혼담이 있었는데 일본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합니다. 그나마 한국여성과 결혼을 강행한 것은 이우왕자의 투철한 항일정신의 반영이었습니다. 1936년 4월 23일 장남 이청(李淸)이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습니다.

1942년 중국 산서성 태원으로 전출되셨는데 이 때 거의 3년 동안 항일독립투쟁을 준비하셨다 합니다. 근무지 근처 태왕산 유격대와 백두산 근방 독립군들 그리고 일본군내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관동군을 토벌한 계획이셨습니다. 이는 대한이 우리의 힘으로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을 만큼 실효성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눈치체고 이우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어 히로시마로 발령했습니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했다 합니다.

<1935년 박찬주와의 결혼식[좌]. 아들 이청과 함께[우]>

피폭과 훙서

1945년 6월 10일 중좌로 진급되셨는데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으셨습니다.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 신청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는 탄원을 했지만 모두 거절됐습니다.

운현궁에 머무시는 한 달 동안 윤원선, 김을한과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시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합니다(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원폭 투하.” 1984년 9월 3일). 둘째 여동생 해원왕녀는 히로시마로 전출될 당시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니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라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다 합니다.

1945년 7월 16일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난 후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셨습니다. 히로시마의 서쪽에 위치한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 머물며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하셨습니다. 8월 6일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던 중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福屋)백화점 부근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셨습니다. 그날 오후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되셨습니다.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습니다. 그날 밤 히로시마 남단 니노시마섬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자정이 넘으면서 급속도로 악화되셨고 8월 7일 새벽 고열로 신음하시다 오전 5시 5분 훙서하셨습니다.

<1945년 8월9일 히로시마원폭사망 보도기사>

일본인 수행무관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 중좌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왕자를 대신하여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해서 피폭을 면하였지만 부관으로서 이우왕자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유해가 운구 된 날 8월 8일 밤 자살했습니다.

운현궁매각

1945년 광복 이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황실재산이 강제로 국유화 되었지만 운현궁은 이우왕자의 부인 박찬주가 흥선헌의대원왕의 사유재산이었음을 호소하여 국유화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우왕자의 장남 이청의 소유로 변경된 뒤에 운현궁의 대지는 분할되어 덕성학원 등에 매각되었고 1993년 운현궁 전체가 서울시에 매각되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와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1959년 10월 17일 이우왕자 유족들의 동의 없이 이우왕자의 신주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습니다.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현 본부에 의해 이우왕자께서 피폭 당한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교 근처에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건립됐습니다.

위령비 전면에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제목문구가 새겨졌고 뒷면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라는 내용이 새겨졌습니다. 1999년 7월 21일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됐습니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