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

<1924년 당의를 입으신 덕혜옹주>

출생

덕혜옹주는 고종광무태황제와 귀인양씨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阿只氏)로 불렸습니다.

<복녕당 아기씨 시절의 덕혜옹주. 출처-국립고궁박물관>

1916년 4월 1일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전에 유치원을 설치하셨습니다.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중앙]. 사진출처-국립고궁박물관>

부황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덕혜옹주가 의민황태자(영친왕)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결혼 하게 될 것을 염려하시어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습니다. 1919년 고종광무태황제 승하 후 1920년 3월 15일 모친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시절

1921년 4월 1일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일본어에 능숙하셨다 합니다. 같은 해 5월 4일 ‘덕혜’라는 호를 정식으로 하사받으셨고 옹주의 존칭을 이때부터 사용하게 됐습니다. 당시 급우의 회고록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왕족다운 기품을 갖추고,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머리는 한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뒤에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하게 늘이고, 일본 옷에 하카마를 입고 학교를 다니셨다 합니다.

또한 상궁이 항상 마차를 같이 타고 와 수업 중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합니다. 다른 학우는 “옹주가 공부를 잘 하였으며, 특히 습자에 능하였다”고 회상했습니다. 덕혜옹주께서는 한국어-일본어로 동요짓기에 능하셨는데, 심상소학교 시절 지은 동요 한 편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권숙인, “히노데소학교의 덕혜옹주-기억의 파편에 조우하며,” 『일본비평』 2010년 2월, 252~266):

일본볼모유학

1925년 정월 유학이란 명목으로 사실상 의민황태자 전하와 같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셨습니다. 4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여 4월 14일 여자가쿠슈인(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셨습니다.

<1925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 슬픈 모습[좌]과 양장차림[가운데] 그리고 1926년 모친 귀인양씨 장례식>

1926년 3월 3일 의민황태자 내외와 귀국하여 순종융희황제를 알현하셨습니다. 4월 25일 순종융희황제께서 승하하셨는데 덕혜옹주께서는 순종융희황제의 인산(因山․왕의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5월 10일 도쿄로 돌아가셨습니다. 1929년 5월 30일 모친 귀인양씨께서 사망하자 6월 2일 귀국했지만 귀인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아 왕공족인 덕혜옹주는 복상하지 못하셨습니다. 6월 9일 일본으로 돌아 온 후 1930년 봄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발현됐고 9월 조현병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정략결혼

1931년 백작 소다케유키(1908~1985)와 정략결혼 하여 1932년 딸 소마사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과 우울증 그리고 조현병이 악화되어 1946년 마쓰자와도립정신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입원이 장기화 되자 다케유키는 의민황태자 부부와 협의 후 1955년 덕혜옹주와 이혼했습니다.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면서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자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의민황태자께서 부담하셨습니다.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됐습니다.

<1931년 소다케유키와 덕혜옹주>

환국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 기자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했고, 1961년 11월 12일 방미 후 동경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이 의민황태자비(영친왕비)와 만나 의민황태자(영친왕) 전하와 덕혜옹주의 환국에 대해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덕혜옹주께서는 15년 가까이 마쓰자와병원에서 지내다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영구 환국하셨습니다.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유치원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卞福童)이 마중 나왔습니다.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알현 후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구황실법개정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셨고, 같은 해 3월 28일 국가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의 생계비 지급을 위해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68년 가을 병세가 호전되시어 퇴원 후 창덕궁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셨습니다. 전 남편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의 면담을 위해 낙선재에 방문했지만 관계자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의 창덕궁 낙선재에서의 투병생활내용을 다룬 중앙일보 1986년 1월25일자 기사>

훙서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 격랑의 역사 속에서 모진 세월을 사시다 향년 78세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훙서하셨습니다. 4월 25일 수강재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영결식이 엄수됐고,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셨습니다.

<훙서직전 1989년 당시 모습[좌]과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친모 복녕당양씨]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구씨[회은황세손]가 보고 싶어요”라고 쓴 덕혜옹주의 마지막 글씨[우]>

사후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년 MBC 광복절특집드라마 <마지막 황녀 덕혜>에서 남편 다케유키가 포악한 꼽추로 묘사됐고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낭설이 유포됐습니다. 하지만 다케유키의 시집작품에는 덕혜옹주가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됐고 실제로 아내 덕혜옹주를 고귀한 존재로 살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신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자신의 생애동안 한국에 대해 비판하거나 나쁜 말을 남기지 않았다 합니다.

덕혜옹주의 유품들은 도쿄문화학원에 기증되었고 이중 복식 7점(당의, 홍색 스란치마, 치마, 송화색 숙고사 반회장저고리, 진분홍 저고리, 풍차바지, 단속곳)은 2015년 6월 24일 일본초전섬유퀼트박물관에서 한국으로 환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큐슈국립박물관에는 덕혜옹주께서 사용하셨던 식기, 옷감, 회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황실사랑회 회원들에 의해 매년 덕혜옹주 기일에 제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0년 우리황실사랑회 덕혜옹주추모제향[첫 번째 두 번째], 이정황손과 이현준사무국장[세 번째],
이원 황태자[황사손]전하와 이갑왕자께서 보내신 화환[네 번째]. 사진출처-우리황실사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