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해경왕녀(海瓊王女, 1930~)

출생과 생애

해경왕녀는 의친왕의 다섯 번째 따님이시며 고종광무태황제의 손녀십니다. 황실명은 이 송, 아명은 이길상이십니다. 생모는 김금덕이시고 법모는 의친왕비 덕인당 김수덕이십니다. 이복언니는 이해원, 이복 남동생은 이 갑, 이 석, 사촌오빠는 이 구, 조카는 황태자 이 원이십니다.

<순정효황후께서 선물하신 프랑스인형과 함께 7세 때 사동궁에서 촬영된 사진>

세 살 때 생모 김금덕과 떨어져 의친왕비와 함께 사동궁에서 사셨습니다. 1949년에 경기여고 1953년에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셨습니다. 풍문여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한국전쟁 당시 주한미8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훗날 컬럼비아대학의 사서가 된 계기가 됐습니다.

<생모 김금덕 여사와 함께>

부친 의친왕의 훙서목도와 미국유학

1955년 8월 16일 새벽 부왕 의친왕 전하의 훙서를 의친왕비와 함께 목도하셨고, 이듬해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텍사스 메리하딘베일러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셨고 1959년 음악석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계속 성악가의 길을 걷지는 않으셨지만 197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가지셨고 1985년 테너 ‘이인선추모음악회’에서 국내무대에 처음으로 서셨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사촌오빠 황태손 이 구 저하와 함께>

1969년부터 뉴욕 컬럼비아대학 동양학도서관 한국학사서로 일하시다 1996년 도서관과장으로 정년퇴직하셨습니다. 컬럼비아대학 사서시절 조선왕실과 대한제국관련 많은 역사자료들을 발굴하셨는데 그중에서도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셨던 부왕 의친왕과 관련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셨습니다. 항일독립투쟁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강제로 부왕 의친왕 전하의 작위 및 사동궁을 비롯한 모든 재산들을 박탈하고 착취한 기록 자료였습니다.

<해경왕녀께서 컬럼비아대학에서 발굴하신 의친왕의 강제 은퇴 기록. Cf.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252>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사료 발굴

이 자료는 국내에도 없는 매우 희귀한 것 이었습니다. 1996년에는 의친왕께서 유학했던 버지니아 로아노크대학교 도서관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도 발굴해 내셨습니다.

<미국 로아노크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굴하신 의친왕[전면중앙]과 김규식[뒷면]이
1901년 3월30일 함께 찍은 사진. Cf. 『나의 아버지 의친왕』, 56>

또한 같은 해 서삼릉에 버려져 방치되었던 의친왕의 묘를 의친왕비가 모셔진 금곡릉에 합장하셨습니다. 전쟁으로 사고로 일찍 사망한 오빠들을 대신해 장남 역할을 하신 것 이었습니다.

<1997년 6월 27일 종묘에서 열린 해경왕녀 저서 ‘나의 아버지 의친왕’출판기념회.
왼쪽부터 이혜원, 이일주, 이석, 이원 황태자, 이송[해경공주], 이구 황태손, 이진, 이찬, 이석주>

<2006년 12월 이 원 황태자 전하와 낙선재를 방문하시어 순정효황후와 영친왕비
그리고 덕혜옹주와의 추억을 회상하셨습니다.>

이후 부왕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하셨습니다. 의친왕의 상해임시정부망명사건인 대동단사건과 임시정부요인들과의 서신교환 그리고 독립자금지원 등 항일독립투쟁과 관련된 연구발굴사업을 개진하셨습니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일본정부에 “고종황제의 투구반환”요청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셨습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운동

해경왕녀께서는 고종광무태황제의 손녀로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환수매입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고종광무태황제의 황실내탕금으로 매입된 조선왕실 최초의 공식적인 재외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개입으로 헐값에 불법으로 매각되고 말았습니다.

<1891년 12월 1일 고종황제께서 Sevellon A. Brown으로부터
$25,000에 매입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1500 13th Street. Iowa Circle]>

체계적인 모금활동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준비를 위해 해경왕녀께서는 재미교포 윤기원과 함께 2007년 1월 Virginia 주정부에 비영리법인 ‘한국역사보존협회’(Korean Historical Preservation Society)를 설립-등록하셨습니다.

이후 해경왕녀와 윤기원 이사장은 2007년 NAVER BLOG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되찾기의 중요성을 개시했고, 이를 본 조민희의 후손인 조원교가 2009년 6월 일본의 불법매각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조민희의 친필서명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민병석의 친필은 해경왕녀께서 한국에서 직접 입수하셨습니다(Cf. 2009년 12월08일자 중앙SUNDAY 구희령 기자와의 인터뷰).

<워싱턴시문서 95. 일본이 불법으로 매도한 증거가 되는 조잡하게 그림 그리듯 날인되어 있는 고종황제와 민병석 그리고
조민희의 서명[좌]. 왼쪽부터 고종황제와 조민희 그리고 민병석의 평소 서명. 붉은 글씨가 계약서에 날인된 서명[우].
자료제공-해경왕녀, 윤기원 한국역사보존협회 이사장>

해경왕녀께서는 건물주 Jenkins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100만 달러에 매도할 것을 약속받고 교포들과 함께 모금운동을 벌이셨습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2012년 8월 21일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의 중개로 주미공사관건물의 매입이 350만 달러로 계약되어 성사됐음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해경왕녀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매입환수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2013년 세금이 적용되는 실제거래시세가가 $808,260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윤기원을 비롯한 현지 대부분의 교민들은
최소 100만 불에서 최대 200만 불 안쪽에서 매입이 가능한 건물인데 왜 시세보다 2~3배 비싼 350만 불에 매입됐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2018년 5월 22일 공사관개관식 때는 지난 10년간 공사관 되찾기 캠페인에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해경왕녀와 재미교포들에게 축사나 개회사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홈페이지에 그 명단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공사관을 되찾기 위해 수고한 주요한 재미교포들과 해경왕녀의 명단이 빠져 소개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홈페이지 소개내용. 참고웹사이트 www.oldkoreanlegation.org>

뜻 깊었던 대한제국공사관 개관식 마지막 황녀에 대한 결례 ‘옥의 티’

2018-05-28 (월)이종국 기자

22일 열린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개관식에서 독립유공자이자 초대 공관원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증손인 이상구 씨가 태극기 게양을 하고 있다. 야속하게도
간간이 비가 내렸다.
22일 오전 워싱턴 D.C.에서 열린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 개관식.

그래도 하객들의 얼굴에는 일제에 빼앗긴 공사관을 되찾은 기쁨이 늦봄의 화왕(花王)
모란보다 풍성하게 피어났다. 200명 가까운 하객 중에는 특별한 손님도 눈에 띄었다.
고종 황제의 손녀인 이해경 여사였다. 뜻 깊은 행사인 만큼 내빈도 많았다. 김종진
문화재청장, 천준호 공사, 랍 우달과 지미 고메즈 연방 하원의원, 정혜숙 DC 부시장,
마크 램버트 국무부 부차관보, 김영천 한인연합회장, 그리고 로건 서클 주민연합회장….

축사와 환영사는 길었다. 취재기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새어나오지 않던
객석에서 나직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니, 이해경 여사 말씀이 왜 없지?”
아흔 노구를 이끌고 뉴욕에서 내려온 황녀에게는 끝내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해경 옹주는 고종황제의 아들로 순종 다음의 왕위 서열인 의친왕(義親王)의
다섯 번째 딸이다. 의친왕비가 자신의 호적에 그를 유일하게 올렸기 때문에
‘조선 황실의 유일한 공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여사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에 미국 유학을 와
컬럼비아 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왔다.
그는 황실 복원을 추진하려는 일부 종친들에 “시대착오적 미몽”이라며 꾸짖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현대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공사관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자강외교를 위해 귀한 내탕금을 내어
매입한 건물이었다. 113년 만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는 그 역사적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하루 전 뉴욕에서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출발했다.

이 여사의 감회는 남달랐다. 비가 내리자 그는 “고종 황제께서 비탄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여사는 공사관을 되찾는데 앞장선
미주 한인들과 모국 정부에 감사의 뜻이라도 짧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간곡한 요청을 주최 측인 문화재청에서는 거절했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한인들은 “주최 측의 역사인식의 부재와 결례가 지나쳤다”고 혀를 찼다.
그나마 테이프 커팅 순서에서는 이 여사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공사관 내부 탐방을
끝내고 망국의 마지막 황녀는 뉴욕으로 발길을 돌렸다. 빗줄기는 더 세차졌다.

<이종국 기자>

<해경왕녀에 대한 문화재청의 결례에 관해 보도한 기사. 자료출처-한국일보 2018-05-28>

2017년 대한제국선포120주년 고종황제즉위식재현행사 및 황실복식전시회 참석

2017년 10월 14일 방한하시어 서울시주관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한제국선포120주년기념 고종황제즉위식재현행사>에 참석하여 고종황제 역을 맡은 조카 이 원 황태자 전하를 격려하셨습니다.

<2017년 10월14일 대한제국선포120주년기념식. 위쪽 좌측부터 임영기회장, 이재이작가, 이태진교수, 해경왕녀,
이그나시오 라꾼사[Ignacio Lacunza]아르헨티나대사관 이등서기관, 황치석교수, 김영관교수. 아래 좌측부터 해경왕녀,
이그나시오 라꾼사 아르헨티나대사관 이등서기관, 김영관 교수>

2017년 10월 16일 서울 강남구 경기여고 내 경운박물관에서 개최된 <대한제국선포120주년기념 황실복식전시 ‘대한제국, 복식에 깃든 위엄’>에 참석하시어 관계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Cf. “백성 생각해...황실 옷에 사치 못 부리게 했죠,” 조선일보 2017-10-24). 경기여고 36회 졸업생인 해경왕녀는 모친이신 의친왕비께서 입으시고 물려주신 녹원삼과 원삼 당의 노리개 등 6가지 황실의류와 장식품들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셨습니다.

<‘대한제국, 복식에 깃든 위엄’전이 열린 서울 경운박물관에서
조부 고종광무태황제께서 입으신 12장황제복 앞에서 촬영하신 해경왕녀. 출처-조선일보>

<경운박물관에서 해경왕녀께서 기증하신 황실유물들에 이야기를 담아 소개한 ‘소장품이야기’ 글. 출처-경운박물관홈피>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고문이시며 독신으로 뉴욕 맨하탄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한인노인합창지도 및 컬럼비아대학 한인학생회 강연 등 다양한 한인사회 봉사활동에도 매진하고 계십니다. 저서로는 『마지막 황실의 추억』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 있습니다.

<2017년 11월 17일 컬럼비아대학에서의 사동궁생활 주제강연 전
김규환 국회의원과 황태자 전하와 담소를 나누시는 해경왕녀>

<2017년 11월 17일 컬럼비아대학에서의 사동궁생활 주제강연 모습>

<2017년 11월 20일 뉴욕 브르클린박물관 Mary & Jackson Burke Collection 관람 후>

<참고자료>

◇“아버지, 이젠 부르고픈 이름이여.” 《주간동아》. 1997년 7월 10일.
◇“마지막 왕녀 이해경씨 경기전 참배.” 《연합뉴스》. 1999년 3월 15일.
◇“고종 손녀 “나는 프린세스가 아니다.” 《시사IN》. 2011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