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의친왕 이 강(義親王 李堈, 1877~1955)

<1891년 의화군으로 책봉됐던 당시의 사진>

출생과 혼례

의친왕 이 강께서는 격동의 구한말인 1877년 3월 30일(음력 2월 16일) 북부 순화방 사재감 상패게 자하동 범숙의(철종의 후궁이며 금릉위 박영효와 결혼한 영혜옹주의 생모)의 궁에서 고종광무태황제의 다섯째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생모는 귀인 덕수장씨이십니다.

17세 되던 1893년 10월 29일 당시 14세였던 김사준 공의 따님이신 연안김씨와 길례를 올리셨습니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11대 후손인 의친왕비의 혼례당시 사진.
출처-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의친왕비는 이런 일제의 만행에 맞서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으셨지만 의친왕의 아이들을 낳은 후궁들에게 수관당, 수인당, 수현당, 수경당, 수덕당, 수완당, 수길당이라는 당호(堂號, 후궁이 거처하는 전각이나 집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후궁이 됐음을 의미하는 궁중의 법도)를 내리셨습니다. 동시에 후궁들이 낳은 아이들을 정리하여 의친왕의 공식적인 자녀들로 입적하셨습니다. 1922년 8남 경길의 모친 수경당을 마지막으로 1930년 이후에는 당호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정세변동으로 왕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현재 인정된 자녀는 총 12남 9녀입니다.

보빙대사파견

18세 되던 1894년 9월 보빙대사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셨고 1895년 명성태황후께서 일본자객들에게 시해당한 같은 해인 8월 25일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을 순방하셨습니다.

<일본 보빙대사 시절의 의친왕[앞줄 중앙 관복차림]>

미국유학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알렌의 주선으로 1899년 알렌이 졸업한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Delaware)에 있는 웨슬리안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 입학하셨습니다.

사실 의친왕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배경에는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황태자 책봉순위 1위였기에 이를 경계했던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로 부터 온갖 음모와 핍박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친일역적매국노 이완용은 이를 악용하여 엄귀비와 공모하여 이토히로부미의 계략을 작동시켜 의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될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원치도 않았던 미국유학길을 억지로 떠나보낸 것이었습니다.

<1899년 미국유학시절의 의친왕>

웨슬리안대학에서 의친왕은 백인청년들에게 중국인으로 오인 받아 몰매를 맞았고 이것이 한미 양국 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자 1903년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 (Roanoke College)으로 옮기셨습니다.

항일독립투쟁

로아노크대학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만나 공부하게 되며 의친왕은 김규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뜻을 공유하셨습니다.

<미국 로아노크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의친왕(전면중앙)과 김규식(뒷면)이
1901년 3월30일 함께 찍은 사진. 출처-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56>

1902년에는 로스엔젤리스를 방문하시어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써 달라”며 금일봉을 전하셨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4월 7일 급히 귀국하시어 대한제국 육군부장 그리고 제2대 대한제국적십자사 총재를 맡게 되며 부황인 고종광무태황제의 항일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조력하셨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거국적인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동력에는 자금지원과 함께 의친왕께서 독립투사들과 함께 이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윤구부장 당시 모습. 출처-해경왕녀>

1907년 1월 15일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이들에게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 봉기에 앞장 설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또한 1909년 10월 경남 거창군 위천에 사는 전 승지 정태균을 방문하여 한 달 동안 머무르며 이 지방의 뜻 있는 우국청년들과 접촉하셨고 그들과 함께 북상의 사선대(思璿臺)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려 하셨으나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되고 말았습니다.

<의친왕이 장차 의병기지로 삼으려 했던 경남 거창의 사선대 전경>

1911년 봄 손병희와 함께 국권회복 방도를 모색하셨는데 8월 우이동에 땅 3만평을 매입하여 1912년 봉황각을 세우셨습니다. 이 봉황각은 천도교의 본거지며 3.1만세운동의 발상지가 됐습니다.

1919년 11월 상해망명 직전 밀사 편으로 임시정부에 밀서와 독립자금을 보내셨고 그 내용이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은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상해망명-대동단사건

3.1만세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19년 4월 발족된 조선민족대동단의 주선으로 1919년 11월 9일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을 추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동(현)역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망명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諭告文)이 뿌려질 계획이었는데 이 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오호라 이번의 만주행은 무슨 이유인가? 하늘과 땅 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요, 뼈가 부서지고 창자가 찟어지는 큰 수치를 씻으려 할 따름이라. 지난날 선황 페하의 밀지를 받들어 바로 일어나려 하였으나 형연극벽(가시나무가 늘어진 벽)의 체자(“늘어진 가시”란 뜻으로 일제의 방해나 감시를 은유한다)를 생각하여 이를 숨기고 아직 수행하지 못하였더니 작금의 대흉한은 선황을 그 독수로 살해하였도다.
오라. 생명을 보전하여 무슨 일리 있으리요. 오직 스스로가 죽지 못함이 한이었도다. 이때를 당하매 개세융운(“일세를 즐기고 운세를 융성한다”는 뜻으로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의 사가 없으며 우리 2천만 민족의 생사가 중대한 시기를 맞이하여 앞의 함정도 뒤의 채찍도 돌보지 아니하고 궐연히 나는 궐기하였노라. 오로지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고 분발 전진하여 3천리의 응기(“가슴에 품은 터” 또는 “가슴에 품은 업”이란 뜻으로 의친왕의 굳건한 항일독립투쟁의지를 내포하고 있다)를 극복함으로서 2천만의 치욕을 설하고 공통적 세운의 도래를 맞이함에 후퇴하지 말라 오호 만세 건국 4242 11월 9일 의친왕 이강(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242~243).

<상해임정 망명 당시 의친왕. 출처-해경왕녀>

의친왕의 대동단망명사건은 일제를 경악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대한제국의 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으셨던 의친왕께서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합류 한다면 임정의 위상이 엄청나게 달라질 뿐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동단망명사건으로 의친왕께서는 일본에 의해 한반도 내에서의 자유여행이 박탈됐고 사동궁에 연금되셨습니다. 연금 상태에서도 의친왕께서는 1919년 11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제2독립선언서를 공포하셨습니다. 또한 1921년 8월 미국에서 결성된 항일독립투쟁단체 대한민족대표단(大韓民族代表團)에도 가입하셨습니다. 만주 시베리아에서 활약하던 김좌진 김광서 지청천 홍범도 장군들의 항일독립전투도 지원하셨습니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종손 최준의 항일독립운동도 도우셨습니다.

의친왕께서는 수산협회를 결성하여 한국 어업권보호에 앞장서셨고 경상도 진해 통영 창원 그리고 함경남도 영흥 어장에서 발생되는 수익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셨습니다.

<‘수산협회발회식’제목으로 의친왕의 수산협회총재취임식을 보도한 1922년 5월4일자 『매일신보』기사>

사상 최초로 한국산 만월표 고무신을 신으시며 항일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으셨는데 이는 왕족 가운데 의친왕께서 항일의식이 가장 투철했기에 일반 국민들과 친일역적매국노들에게는 항일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동화약방 소화제 부채표 활명수 광고지원을 통해 항일독립투쟁도 지속하셨습니다.

<동화약품 활명수의 시대별 디자인.
맨 왼쪽이 최초로 출시된 포장이며 의친왕께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즐겨 드신 활명수입니다.>

사상 최초로 한국산 만월표 고무신을 신으시며 항일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으셨는데 이는 왕족 가운데 의친왕께서 항일의식이 가장 투철했기에 일반 국민들과 친일역적매국노들에게는 항일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동화약방 소화제 부채표 활명수 광고지원을 통해 항일독립투쟁도 지속하셨습니다.

다자녀출산 통한 항일독립투쟁

3.1만세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19년 4월 발족된 조선민족대동단의 주선으로 1919년 11월 9일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을 추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동(현)역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망명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일제 치하 의친왕의 삶은 감시와 핍박 아래 있었습니다. 1926년 순종융희황제께서 후손 없이 승하하실 때까지 곁을 지켰던 의친왕은 일제가 황실의 맥을 끊기 위해 커피에 독을 타는 등 순종융희황제의 생식기능을 망가트리는 천인공노할 온갖 못된 악행들을 직접 목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의친왕비께서 인정한 의친왕의 자녀는 총 12남 9녀이며 그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친왕(이강) 1877.03.20 ~ 1955.08.16 의친왕비(연안김씨) 1878.12.22 ~ 1964.01.14 (자녀없음)
순위 왕실이름 아명 호적명 생손연대 생모 기타 손자
1남 용길   1909 ~ 1991 저관당 정씨   충, 기
2남 성길   1912 ~ 1945 수인당 김홍인 운형궁 양자
3남 홍길 해진 1914 ~ 1951 수현당 정운석 후손없음  
4남 창길 해직 1919 ~ 사망 조병숙 완평궁 양자 일주, 석주
5남 수길 해일 1918 ~ 1982 수인당 김홍인 대궁 양자 한주, 호
6남 명길   1920 ~ 사망 수인당 김홍인  
7남 형길 해청 1921 ~ 1952 송씨 계동궁 양자  
8남 경길   1922 ~ 1995 수경당 김씨 후손없음  
9남 충길 해룡 1938 ~ 함씨   상현
        2014     원, 황태자[황사손], 상우
10남 영길 해석 1940 ~ 서울 홍정순    
11남 문길 해선 1944 ~ 미국 김혜수   성준
12남 정길 해준 1947 ~ 미국 홍정순    
1녀 길순 해완 1915 ~ 1981 수덕당 이회춘    
2녀 길운 해원 1919 ~ 미국 수덕당 이회춘    
3녀 길연 해춘 1902 ~ 서울 수완당 김씨    
4녀 길영 해숙 1920 ~ 사망 수길당 박영희    
5녀 길상 해경 1930 ~ 뉴욕 김금덕    
6녀 회자 회자 1940 ~ 미국 김혜수    
7녀 숙기 해란 1944 ~ 남미 홍정순    
8녀 숙향 해련 1950 ~ 서울 홍정순    
9녀 창희 창희 1953 ~ 미국 김혜수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일제는 1930년 6월 12일 의친왕의 공 작위를 강제로 폐위하고 이강 전하로 격하한 후 사동궁을 포함한 모든 재산과 작위를 큰아들 건에게 물려주게 했습니다.

<의친왕(가운데)과 큰아들인 이건(왼쪽), 작은 아들인 이우(오른쪽)의 사진>

사동궁재산몰수

결국 해방이 되어서도 황실을 견제했던 이승만이 대한제국황실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1945년 9월 23일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하면서 사동궁을 포함한 모든 재산들이 대한 민국정부에 의해 강탈되고 말았습니다.

<1947년 5월 John Florea 라이프지 기자가 창덕궁 인정전 안과 밖에서 촬영한 의친왕과 이수길(황실명 이주) 황손 그리고 이수길 황손의 부인. 출처-우리황실사랑회>

훙서

안동별궁으로 이사 후 6.25가 발발해 부산으로 피신하셨는데 결국 6.25전쟁 후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1955년 8월 16일 새벽 4시 안동별궁 상궁쪽방에서 의친왕비와 5녀 해경왕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의친왕께서는 78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뒤로한 채 훙서하셨습니다.

<의친왕께서 훙서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안동별궁 상궁쪽방 전각의 일부.
현재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됐고 서울시가 추진하는 공예박물관 설치가 추진 중입니다.>

천주교귀의

훙서하시기 전 1955년 8월 9일 의친왕께서는 제2공화국 총리 장면을 대부로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은 왕비 김숙과 함께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에 귀의하여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 최초의 공식적인 천주교신자가 되셨습니다.

귀의 동기는

(1)조부이신 흥선대원군께서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켜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사람으로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과 그렇게
(2)무자비하게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3)그 후 천주교세력이 날로 번성했다는 것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곧 진리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의친왕의 훙서를 보도한 1955년 8월18일자 『경향신문』기사>

<내무부 장관이 보낸 의친왕 장례식 조서. 출처-이해경 『마지막황실의 추억』, 260>>

친모이신 귀인장씨의 묘소가 있는 서삼릉 묘역에 안장되셨다가 5녀 해경왕녀의 노력으로 1996년 홍유릉 의친왕비묘역으로 이장되어 합장되셨습니다.

<1980년 8월15일 MBC광복절특집드라마<의친왕>신문광고. '일제에 항거한 유일한 왕손, 의친왕 이강의 비운의 일대기!' '한말의 거센 풍랑 속에 타오르는
사내들의 우국애정과 여인들의 한과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의 광고를 실었습니다. 의친왕 역에 이정길, 고종광무태황제 역에 정욱, 명성태황후 역에는 김영애, 의친왕비 역에 고두심,
의친왕의 생모 귀인장씨 역에 김혜자가 출연했습니다. 연출은 이병훈이 맡았습니다. 출처-우리황실사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