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1851~1895)

명성태황후는 조선왕국의 제26대 왕후이며 대한제국 고종광무태황제의 추존황후십니다.

명성태황후의 치적은 이은유 저 『명성황후: 조선의 국모』(서울: 자음과 모음, 2012)와 한지은 저 “언더우드가의 여성선교사: 릴리어스 언더우드(1851-1921)와 에텔 언더우드(1888~1949)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제60(2015): 355-390에 잘 묘사되어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은유 저 명성황후 책자 표지>

개혁정치 및 개화정책주도

명성태황후의 가장 중요한 치적들 중의 하나는 바로 ‘동도서기’정책이었습니다. 즉, “동양의 도를 존중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라는 모토인데 서양의 좋은 점을 배우고 수용하되 서양의 모든 문물들을 다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역사-문화적 가치관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화혼양재’ 개화성공사례와 청의 개화정책인 ‘양무운동’(서양의 기술을 받되, 중국의 정신을 유지한다)을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책을 바탕으로 명성태황후께서는 젊은 관료들과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개화파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서구문물들과 기술들을 수용했고 이들을 우리의 것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식군대인 ‘왜별기’(나눌왜에 재주기자, 재주를 전문화한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근대교육기관설립

명성태황후께서는 여성교육과 계몽을 위한 근대교육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셨습니다. 1886년 5월 30일 의료선교사 스크랜턴(Mary Scranton,1832~1909)에게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정동에 윤허하셨는데, 이듬해인 1887년 이 여학교는 명성태황후의 사명(賜名)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현 이화여고-여대)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렇게 명성태황후의 여성 계몽교육의 선두에 있었던 이화학당은 3.1만세운동 당시 천안 목천과 서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여성독립운동의 상징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배출했습니다.

<1916년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 열사의 사진[뒷줄 오른쪽 첫 끝].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사촌언니 유예도, 중앙은 지도교사 박인덕. 사진출처-이화여자대학교>

또한 주치의 중의 한명이었던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 1860~1938)에게 황실의 땅을 하사하시어 정동여학교(현 정신여고)를 설립토록 하셨습니다.

<정신여고 교정에 세워진 정신여학교 초대교장 엘러스의 흉상>

<정동여학교 학생들과 2대 교장 헤이든[왼쪽 끝] 그리고 3대 교장 도티[왼쪽 2번째]. 정신여학교는 김마리아를 비롯한 김순애 김여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정숙 장선희 등 한국여성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는 명성태황후의 교육정책이 열매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사진출처-정신여고>

근대여성의료기관설립

또한 여성을 위한 의료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셨는데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all·1865∼1951) 선교사에게 평양기홀병원, 광혜여원, 그리고 동대문부인병원(현 목동 이화여대병원)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여의사 박에스더(1876~1910)는 명성태황후의 여성의료교육 지원으로 배출된 한국 최초의 여의사였습니다.

<대한제국 기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Ester Kim Park)는 고종14년(1877)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광산이고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입니다. 박에스더는 이화학당 졸업 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명성태황후께서 설립하신 보구녀관(普救女館)에서 진료활동을 했습니다. 귀국 후 10개월 동안 진료한 환자가 3천명이 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1910년 4월 13일 폐결핵으로 34세에 사망했습니다.>

<명성태황후의 윤허와 미국감리교선교회 지원으로
메리 스크렌튼(Mary Scranton, 1832~1909)선교사의 주도로 설립된 국내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 보구녀관.
보구녀관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과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 됐습니다.>

장애인특수교육시도 및 여성의 사회활동장려

명성태황후께서는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Sterling, 1851-1921) 선교사를 통해 조선의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도 시도하셨습니다. 또한 대한 기독교 여자절제회, 구제품구호회, 연희교수부인회 등의 설립을 윤허하시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셨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국YWCA 창설을 위한 창립기금 5천 엔도 기탁하셨습니다.

<명성태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초상화는 모두 사후에 발행된 것이지만 위 사진은 유일하게 생전에 나온 것으로
일본 최고의 석판화가 오카무라 마사코(岡村政子, 1858~1936)가 1894년 신양당에서 출판한 것입니다.
명성태황후의 외모는 “아름다운 미인으로 옥안의 예지가 빛나고 우화하고 친절하신 태도로 말씀하시며 용자(容姿)의 전체가 기민하신 성격을 표시하셨다”라고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묘사했는데 이 내용이 마사코가 그린 명성태황후의 모습과 가장 일치하며 신뢰할만합니다.
Cf.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 조선일보, 1934년 4월 7일자 부록 3면 “사외이문[史外異聞] 민후의 어모”; 송광호, “명성황후 사진 원보 가능성 입증,” 강원도민일보 (200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