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尹氏, 1894~1966)

순정효황후께서는 대한제국 순종융희황제의 황후시며 해평(海平)윤씨 윤택영의 따님이십니다.

항일독립투쟁

1910년 8월 한일병탄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다 친일역적매국노들이 순종융희황제께 한일병탄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어 이를 저지하려 분투하셨 으나 결국 숙부 윤덕영(1873~1940)에 의해 빼앗기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분개하신 순정효황후께서는 독립투쟁가였던 큰 오빠 윤홍섭(1893~?)에게 당시 거금이었던 황실내탕금 10만원을 기탁하시여 이를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에 전달,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전적으로 지원하셨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해공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윤홍섭은 해방 후 구왕궁사무청 사무장관으로 황실재산을 관리했으며, 숙명학원 3대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1949년 4월 국회에 ‘숙명학원재단 재건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진성서의 내용은 “구왕궁청 소유재산의 일부를 분할해 재단법인 숙명학원 기본재산에 편입하고 숙명여자대학과 숙명여자중학교 경영에 지장이 없도록 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장은 윤홍섭과 친분이 깊었던 신익희였습니다. 이 안은 재석의원 104명 가운데 71명의 찬성으로 가결됐습니다. 또한 1950년 제정된 <구왕궁재산처분법> 제4조에는 “구왕궁의 기부행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유지경영에 필요한 재산은 양여한다”라는 조항도 만들었습니다. 황실에서 설립한 학교에 대한 지원이 법적으로 명문화되도록 노력했습니다(Cf. 강혜경 교수의 숙명타임머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윤홍섭 그리고 숙명,” 숙대신보, 2015-05-24).

이렇게 순정효황후께서는 큰 오빠 윤홍섭과 신익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독립투쟁을 측면지원하시며 친일역적매국노들에 의해 찬탈된 국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6.25전쟁과 정릉살이 그리고 창덕궁환궁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창덕궁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던 조선인민군들을 크게 호통 쳐 내보내셨을 정도로 순정효황후께서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셨습니다. 1951년 피난길에 올라 운현궁과 흥천사에서 피난살이를 하시며 잠시 창덕궁을 비우셨습니다. 전쟁 후 창덕궁으로 환궁하려하셨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그리하지 못하셨습니다.

긴 세월 일국의 황후셨던 분이 왕릉제사에 쓰이는 제기들을 보관하던 정릉 수인제(修仁齊)에서 참혹한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1959년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으셨습니다. 이듬해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나서야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창덕궁 낙선재로 환궁할 수 있으셨습니다.

<1960년 7월 창덕궁으로 환궁하시는 순정효황후. 왼쪽부터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 상궁 유경운, 상궁 박창복>

<1960년 7월 창덕궁 환궁 후 알현 받으시는 황후>

훙서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신 의민황태자와 의민황태자비 그리고 덕혜옹주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시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셨습니다. 훙서하시기까지 대한제국황실의 황후로서 온화한 성정과 기품 그리고 당당함과 냉철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평생 영어공부에 매진하셨는데 그 실력이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셨다 합니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73세에 훙서하셨습니다.

<1964년 촬영사진>

<1966년 2월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