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

아관파천(俄館播遷)주도와 의민황태자(영친왕)출산

순헌황귀비께서는 의민황태자의 친모시며 고종광무태황제의 후궁으로 명성태황후 훙서 후 황후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고종광무태황제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의 주도는 순헌황귀비의 과감한 성품과 고종광무태황제에 대한 남다르고 대담한 충성심이 잘 반영된 사건이었습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광무태황제를 보필하며 43세에 잉태하여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의민황태자 은(垠)을 출산하셨습니다.

<엄상궁을 귀인으로 령하는 고종광무태황제의 칙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광무태황제께서 강제로 퇴위당하시고 의민황태자께서 유학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으시며, 1911년 7월 20일 덕수궁 즉조당 에서 58세에 갑자기 훙서하셨습니다. 일본 측이 내세운 사인은 장티푸스였으나 일본에 있는 14살의 의민황태자가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사진을 보시다 감정이 북 받쳐 화병에 숨을 거두셨다 합니다.

근대민족교육기관 설립 및 황실사회사업활동

순헌황귀비께서는 기독교선교사들의 학교설립과 구국운동에 자극을 받아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잘 파악하시어 여성인재양성에 뜻을 품고 황실에서 하사받은 황해도 경기도 전라남 도 일대의 농경지 1천여 정보와 280만평의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하는 사재(私財)를 들여 1906년 진명(進明)여학교와 숙명(淑明)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창설 하셨습니다. 1907년에는 경영난에 허덕이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우셨습니다. 이외에도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게 하셨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1906년 명신여학교 설립 당시의 모습>

<순헌황귀비께서 설립하신 명신여학교와 양정의숙은 근대민족교육의 산실로 오늘날 숙명여자중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진명여자중고등학교 양정고등학교로 성장해 대한민국의 선진교육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2018년 3월 용산구청에서는 “우리나라 여성근대교육발전에 기여하셨던 순헌황귀비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용산구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업의 일환”
(Cf. “순헌황귀비길을 아시나요?,” 아시아경제 2018-03-27)으로 청파로47길(폭15m, 길이630m)에 ‘순헌황귀비길’ 명예도로명을 설치했습니다. 사진출처-아시아경제>

종로의 걸인들에게 자선을 베푸셨고 불탄 종로상점 재건축 비용이 모자라자 건축비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에 기금과 건물도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의 모범 잠업장 건립에 기금을 하사하시는 등 황실의 적극적인 자선사업활동을 통해 노불리스 오불리제(Noblesse Oblige)의 모범을 몸소 실천하신 존경받던 분이셨습니다.

아래의 자료들은 순헌황귀비에 대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숙명100년사』(숙명여자대학교. 2006).
박용옥.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45(2). 숙명여대 아시아 여성연구소, 2006.
김상태. “1903년 엄비(嚴妃) 황귀비(皇貴妃) 진봉(進封)과 『순비진봉황귀비의궤(淳妃進封皇貴妃儀 軌)』.”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 2 (서울대 규장각, 2004).

<칠궁에 모셔진 순헌황귀비의 사당 덕안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