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순종융희황제(純宗隆熙皇帝, 1874~1926)

<원유관 강사포 복식의 순종융희황제>

순종융희황제는 조선의 제27대 국왕이시며 대한제국 제2대 황제십니다.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광무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차남으로 출생하셨습 니다. 1875년 3월 8일 2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됐고,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같은 해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셨습니다.

<왕세자 시절 부황 고종광무태황제와 함께>

1898년 김홍륙이 고종광무태황제와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커피에 과다 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광무태황제께서는 맛이 이상하여 뱉었으나 황태자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 복용하여 이가 다 빠져 틀니를 끼게 됐고 혈변으로 인한 장질환 후유증으로 고생하셨습니다.

1907년 1월 21일 고종광무태황제로부터 대리청정위임을 받으셨고 같은 해 4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나 헤이그특사 파견 이후 고종광무태황제께서 강제로 퇴위되시자 1907년 7월 19일 황위를 계승하셨습니다.

<왼쪽부터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출처-네이버백과사전>

황위를 계승하셨지만 일본의 끊임없는 한반도 침탈야욕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날들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결국 1910년 한일병탄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탄되었고 순종황제께 서는 모든 권한을 잃고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되시어 원치 않게도 창덕궁에서 식물원과 동물원을 관리하시며 기거하시게 되셨습니다.

<대훈위 국화장경식을 단 순종융희황제>

1926년 4월 25일 승하하셨고 부황이신 고종광무태황제의 홍릉 근처 유릉(裕陵)에 안장되셨습니다. 순종융희황제의 죽음이 일본과 친일역적매국노들의 작당이라는 소문이 돌며 장례식 날 창덕궁 주변에서는 대대적인 6·10만세운동이 발발했습니다. 3.1만세운동 만큼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계파와 사회주의계파가 합작한 항일독립투쟁단체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종융희황제 장례식 때 오열하는 상궁들>

다음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 등에 의해 창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됐던 교민신문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자에 실린 순종융희황제의 유조(유서)입니다.

이 유조에서 순종융희황제께서는 “지난날(1910년)의 한일병합 인준은 역신(이완용 등을 지칭)의 무리가 제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내가 한 바가 아니다.
소위 병합 인준을 비롯한 한·일간 여러 조칙들은 파기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또한 이 조약체결 당시 “일제는 나를 유폐하고 협박했다,” “민족의 광복 노력에 혼백으로 라도 돕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이 유조는 순종융희황제께서 1926년 4월 26일 승하하시기 직전, 시종인 전 궁내부 대신 조정구에게 구술하신 것으로 나라를 잃은 후 구차히 목숨을 이어 간 17년 세월에 대한 순종융희황제 페하 자신의 회한과 2천만 동포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을 절절히 담고 있습니다. 조정구가 국내에서의 공개가 어렵게 되자 해외독립 운동가들을 통해 신한민보에 실은 것입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명예교수가 미 남가주대도서관에서 입수하여 1997년 11월 14일자 경향신문에
최초로 공개한 “‘마지막 황제’의 피맺힌 유서” 기사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