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이곤왕자(李錕王子, 1919~1984)

이곤왕자는 이 원 황태자 전하의 당숙으로 의친왕의 6남이십니다. 생모는 수인당김씨(修仁堂金氏) 김흥인(金興仁)으로 아들 없이 죽은 이준용의 양자가 된 흥영군 이우왕자는 동복 친형입니다. 광복 후 손위 황손들이 모두 출계하였기 때문에 사동궁(寺洞宮, 의친왕부)의 사손(嗣孫, 상속자)이 되셨습니다. 이복 형 이 건이 1947년 일본으로 귀화했고 다른 형 이 수(주)는 인평대군가문의 종손이었던 이인용의 양자로 입양됨에 따라 의친왕 훙서 후 당시 살아있던 형제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의친왕가의 가독을 이어받았습니다.

<의친왕의 자녀들, 상단좌측부터 5남 이수왕자[이수길], 장녀 이해완왕녀, 4남 이창길왕자,
3남 이홍길왕자, 하단좌측부터 6남 이곤왕자[이명길], 차녀 이해원왕녀, 사진출처 이해원왕녀 소장자료>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문화재청)의 허가로 덕수궁에서 7년간 거주했습니다. 1953년 이승만에 의해 강제로 국유재산이 된 구 왕실재산 700만환에 해당하는 건물과 토지를 매각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징역3년이 구형됐으나 동기가 생활고였고 전과가 없고 6.25사변 이전에는 국가보조금이 지원됐으나 그 이후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정상 참작되어 징역2년 집행유예5년이 언도됐습니다.

황실을 핍박했던 이승만정권의 몰락 후 1960년 황실과 각별한 사이였던 장면총리의 천거로 국회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1955년 8월 9일 당시 장면(張勉)총리는 부통령이었는데 의친왕이 병석에서 천주교로 개종할 때 대부(세례명 요한)가 되어 의친왕의 영세를 도울 정도였습니다. 1962년 국회도서관 사서 직 퇴직 후 다시 생활고에 시달렸는데 1964년 황호현 국회의원 등의 주선으로 국회사무처 기능직직원(방호원)으로 임용되어 1974년 퇴직했습니다.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기거했던 전각이 헐려 덕수궁에서 쫓겨났고 청량2동 205번지 홍릉 옆 영휘원(永徽園, 순헌황귀비엄씨의 묘소)재실에서 매년 임대료 2,250원을 물고 생활하던 중 1968년 당시 57세 때 문화재관리국 영휘원 임시직원(산림보호직) 한경숙(韓景淑, 47세)으로부터 “왕족이면 다냐. 나가라”라는 폭언과 함께 전치4주의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4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미관상의 이유로 이곤왕자의 영휘원재실거처를 강제로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문화재관리국이 철거하기 전 7번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곤왕자는 돈이 없어 거처를 옮기거나 구하지 못했다 합니다.

1984년 1월 14일 교통사고로 서울성바오로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국회사무처 퇴직 후 아내 황경생(黃庚生)씨가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겨우 꾸려갔습니다. 병원입원 중 뇌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호전되지 않아 그 해 훙서하셨습니다. 자녀로는 이 수 황손과 이 준 황손이 있습니다.

<운현궁에서 촬영된 사진. 상단좌측 4녀 해숙왕녀, 차녀 해원왕녀, 3녀 길영왕녀, 4남 창길왕자부인, 차남 이우왕자부인 박찬주여사,
3남 홍길왕자부인, 장녀 해완왕녀, 5녀 해경왕녀, 박찬주여사여동생, 하단좌측 5남 수길왕자, 8남 경길왕자, 차녀 해원왕녀부군,
3녀 길연왕녀부군, 4남 창길왕자, 차남 이우왕자, 3남 홍길왕자, 장녀 해완왕녀부군, 박찬주여사둘째동생, 6남 이곤왕자[명길], 박찬주여사 셋째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