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해원왕녀(海瑗王女, 1919~2020)

출생 및 생애

해원왕녀는 이 원 황태자 전하의 고모님으로 고종광무태황제의 손녀이자 종로구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차녀로 1919년 출생하셨습니다. 황실명은 이진(李珍), 아명은 이길운(李吉雲)으로, 이해원(李海瑗)이란 이름은 당시 일제에게 의친왕의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7촌 재당숙 이기용의 호적으로 들어갈 때 지은 법적 이름입니다.

<19세 결혼식 사진>

사동궁에서 부왕 의친왕의 귀여움 속에서 자라셨고 종로소학교 입학 후에는 운현궁에서 기거하셨습니다. 1936년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후 같은 해 이승규(李昇圭)와 결혼하셨습니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을 졸업했던 남편은 한국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이후 집안이 몰락해 남편 없이 4남매를 혼자 키우셨습니다.

<운현궁에서 촬영된 사진. 상단좌측 4녀 해숙왕녀, 차녀 해원왕녀, 3녀 길영왕녀, 4남 창길왕자부인,
차남 이우왕자부인 박찬주여사, 3남 홍길왕자부인, 장녀 해완왕녀, 5녀 해경왕녀, 박찬주여사여동생, 하단좌측 5남 수길왕자, 8남 경길왕자,
차녀 해원왕녀부군, 3녀 길연왕녀부군, 4남 창길왕자, 차남 이우왕자, 3남 홍길왕자, 장녀 해완왕녀부군, 박찬주여사둘째동생, 6남 명길왕자, 박찬주여사 셋째동생>

정치활동 및 재산찾기 소송

1987년 12월에서 1988년 1월까지 신민주공화당 여성문화연대특임위원을 역임하셨습니다. 1992년 아들을 따라 미국에 가셨다가 2002년 귀국한 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빈민촌의 네평짜리 무허가 월세방에서 공사장 노동일을 하던 둘째 아들 이진왕과 함께 어렵게 노년을 보내셨습니다. 서울 연희동 땅 1만평 찾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셨습니다. 2005년 11월에서 2006년 2월까지 자유민주연합 여성문화연대특임고문을 역임하셨습니다.

<2005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빈민촌 4평짜리 생활공간에서의 안타까운 모습. 출처-우먼타임스>

여제추대

2006년 9월 29일 대한제국황족회에 의해 문화대한제국여제(文化大韓帝國女帝)로 추대되셨습니다. 당시 여제로 추대되신 이유는 해원왕녀께서는 “당호(堂號.황족인정)를 받은 의친왕비 자녀 중 서열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현재 국민에게 잘못 비쳐지고 있는 황실문화를 바로잡고 지금의 과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적임자”섰기 때문이었습니다.

<2006년 9월 26일 여제대관식. 출처-연합신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훙서하신 이 구 황태손의 황위 계승자의 양자를 입적시킨 것은 “왕실제사를 모시는 역할에 국한될 뿐 황실법통승계는 문중일 뿐인 대동종약원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황위승계는 어디까지나 황실의 직계손들이 전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며 “경국대전의 왕위계승 순서는 대군→군→공주→옹주→순”이어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의견이 개진됐습니다(Cf. 김용수. “황위승계는 대한제국 황실복원의 첫걸음.” 한국경제. 2006-9-29).

<용산구 동자동에 위치한 대한제국황실 사무실>

훙서

해원왕녀께서는 2020년 2월 8일 향년 101세로 훙서하시기까지 살아있는 황족들 중 서열이 가장 높으셨고 또한 일제에 의한 황실탄압과 말살정책 그리고 이승만정권에 의한 황실재산몰수 과정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셨던 산 증인이셨습니다.

<훙서 직전의 모습. 말년 어려운 삶을 사셨지만 황족으로서의 품위와
긍정적인 마음의 태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출처-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