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英親王] 李垠, 1897~1970)

출생

1897년 10월 20일 경운궁 숙옹재에서 출생하신 의민황태자는 대한제국 고종광무태황제의 일곱째 왕자시며, 친모는 순헌황귀비 엄씨십니다. 순종융희황제와 의친왕 그리고 덕혜옹주와는 이복남매 지간이십니다.

대한천일은행장역임

1902년에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임명되셨는데 내장원경 이용익(1854~1907)이 부장으로 임명되어 의민황태자를 보좌하였습니다. 대한천일은행은 고종광무태황제의 황실내탕금 3만원으로 설립됐는데 대부분의 주주들은 한성의 유력한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는 한성이 상업중심지로 급부상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유경제체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고종광무태황제의 광무개혁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1902년 대한천일은행장 당시 사진[좌]과 조선왕실원찰(願刹) 흥천사에 남아있는
5세 때 쓴 의민황태자의 글씨 ‘영친왕전하오세서’[우]>

교육과 황태자책봉

1906년 12월 7일부터 근대식 교육기관인 수학원에서 강학을 시작하셨고, 1907년 3월 11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를 치르셨습니다. 같은 해 8월 7일 태황제 고종의 조서에 따라 순종융희황제의 황태자로 결정되셨습니다. 8월 16일 대한제국 육군보병 참위에 임명되셨고 9월 7일 황태자로 책봉되셨습니다.

황태자비간택령

1907년 3월 12일 의민황태자에 대한 초간택이 이루어져 재간택 대상자로 7인이 뽑혔는데 민영돈의 딸 민갑완(1897~1968)이 황태자비로 간택됐습니다. 그러나 의민황태자께서 같은 해 11월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떠난 후 약혼반지를 전달 받았으나 결국 일본에 의해 파혼 당한 후 민갑완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수절하며 한 많은 여생을 보냈습니다.

<의민황태자의 정혼녀 민갑완. 당시 전통대로 한번 정혼한 여성으로 평생 수절하셨고 독립운동에도 헌신하셨습니다.>

일본볼모유학과 군입대

1907년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5일 동안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방한했는데 순종융희황제와 함께 황태자 자격으로 요시히토를 영접했습니다. 이후 11월 13일 순종융희황제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같은 해 11월 19일 갑자기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유는 황태자가 영민하니 일찍 신학문을 배워야 하며, 일본 황태자의 방한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 가야한다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유학 또는 황태자 답방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한제국 황태자를 볼모로 삼아 한반도를 영구통치하겠다는 이토히로부미의 농간이었습니다.

<일본에 볼모로 가기전의 의민황태자와 이토히로부미>

모친의 훙서

1910년 한일병탄으로 이왕세자로 격하되셨는데 이듬해 7월 20일 모친 순헌황귀비 엄씨가 훙서하자 7월 23일 귀국하여 장례 참석 후 8월 5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황족과의 정략결혼

1916년 8월 3일 한국과 일본의 각 신문에 의민황태자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약혼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결혼은 한일병탄 이전부터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계획됐었고 이완용과 합의된 사항이었습니다. 결국 친일역적매국노들은 일본의《황실전범》(皇室典範)까지 개정하면서까지 1920년 4월 28일 의민황태자와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을 강행하고야 말았습니다.

<의민황태자와 일본황족 마사코의 혼약을 알리는 1916년 도쿄 아사히신문 기사>

순종융희황제의 붕어와 왕위계승

1926년 순종융희황제가 붕어하시자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창덕궁 이왕(李王) 은 전하’가 되셨고 그때부터 영친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됐습니다.

유럽왕실탐방

1927년 5월 24일 의민황태자와 태자비는 요코하마항에서 유럽왕실탐방여행을 떠났습니다. 일본은 한국에 아직도 독립된 황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의민황태자 부부를 백작부부로 위장하도록 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민황태자께서 중국 상하이에 정박하는 날을 잡아 납치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모셔 항일독립투쟁에 합류시킬 계획이었지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의민황태자 부부는 7월 4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후 프랑스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영국왕 조지5세, 네덜란드 빌헬미나여왕, 교황 비오11세,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 독일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을 차례로 예방하셨습니다.

군에서의 리더십

의민황태자께서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 졸업 후 제국육군에 입대하셨는데 사병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 1940년 12월 2일 중장에 이를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나셨습니다.

<1923년 일본육군대학 졸업 무렵의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한국문화재 보호활동

의민황태자께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한국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절감하셨는데 조카 이 우왕자를 통해 민요와 창극이 수록된 레코드판과 민속품들을 구해오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일본 근대서양화 작품수집에도 열심이셨는데 주로 1930년대 일본 근대서양화 작품들을 수집하셨습니다. 이 작품들은 이왕가미술관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태평양전쟁 후 의민황태자는 일본도 한국도 인정치 않는 황족으로 결국 일반평민으로 추락하셨는데 이승만정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무국적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해방 후 한국 내에서 황실복권에 대한 논의가 지속됐는데 당시 이승만정부는 황실복권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전략적으로 황실을 견제한 것이었습니다. 1950년 2월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은 의민황태자를 만나 환국하지 말 것을 강요했습니다.

<의민황태자[영친왕]를 만나 환국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승만. 삐딱하게 앉아 있는 자세가 매우 불손합니다.
이때 의민황태자께서는 심정이 어떠하셨을까요?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 그것도 전주이씨 같은 씨족일원에 의해 의민황태자께서는 이렇게 치욕을 당하신 것 이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강용자, 지식공작소, 2013]에 기록된 영친왕비의 증언입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2월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에 온 이대통령을 만나러 전하를 모시고 맥아더사령부에 갔었는데, 만나는 것조차 귀찮다는 투였어요.
대통령은 전하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않고 ‘오시려면 오시오’라는 말만 던질 뿐이었어요.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였던 신흥우씨가 두 사람을 뒤따라 나오면서
‘대통령의 심리를 도대체 모르겠다. 자신도 전주이씨 몇 대손이라고 자랑하곤 하면서 정작 종손인 이왕을 저리 냉대한다.
아마 조국에서 이왕을 동정하고 인기가 높아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으니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반면 맥아더장군은 의민황태자 전하를 한국의 황태자로 각별히 예우했고 궁핍한 황태자와 황태자비께 매달 적잖은 생활비를 지원했다 합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의민황태자께서는 유엔군을 위해 『A First Book of Korean』제목의 한국어 교본을 저술했습니다. 따라서 맥아더장군은 6·25전쟁 당시 한국인 출신 군 전략가가 없어 일본육사에서 제대로 배운 의민황태자 전하를 군 요직에 추대해 실제 전쟁에 참여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승인치 않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부산에선 민족세력이 나서 의민황태자 전하의 귀국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으나 이도 이승만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Cf. 정승욱,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친왕 환국막았다,” 세계일보 2013년 08월16일).

<1950년 의민황태자께서 저술하신 한국어교본. 이 책의 집필목적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UN군들이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의민황태자께서는 직접 한복도 그리셨습니다. 끝부분에는 아리랑을 소개하셨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한국군뿐만 아니라 UN군들이 아리랑을 즐겨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승만정부 시절 이유립이 의민황태자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왕정복구운동을 하다 체포 구금되어
고문 받았다는 1952년 7월16일 경향신문기사. 일명 왕정복구사건입니다.>

1954년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습니다. 대신 고종광무태황제의 직계와 후궁들에게 매월 생활비를 지급했지만 의민황태자는 제외됐습니다. 1959년 3월 16일 미국에서 유학하던 이 구 황태손을 방문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1959년 미국방문 당시 이 구 황태손과 함께한 사진>

1961년 도쿄에서 영세를 받으시고 천주교에 귀의하셨습니다. 세례명은 요셉입니다.

환국과 훙서

1963년 박정희 의장의 지원으로 혼수상태에서 대한민국으로 환국하시게 되셨습니다. 병상에서 생활하시다 1970년 5월 1일 오전 7시 30분 창덕궁 낙선재에서 붕어하셨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에 안장되셨고 원호는 영원(英園)입니다.

<훙서하시기 전 명동성모병원 입원 당시 모습>

이렇게 의민황태자께서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역설적인 식민역사의 피해자가 되셨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정부의 견제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사셨습니다. 말년 질병의 발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개된 그런 굴절된 삶에 대한 억울함의 호소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