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Daehan Imperial Household

이갑왕자(李鉀王子, 1938~2014)

출생 및 생애

이갑왕자께서는 고종광무태황제의 손자며 의친왕의 아홉 번째 아들로 1938년 2월 6일 한성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호는 정강재(正康齋)로 아명은 이충길(李忠吉) 호적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십니다.

대한제국이 주권을 잃은 후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출생하시어 황실구성원으로서의 적절한 대우는 고사하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후 도미하여 무역업에 종사하시며 평생 평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대한황실이 복원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국민들과 함께 몸소 겪으신 역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우리황실사랑회-의친왕숭모회 설립

대한제국황실의 역사적 정통성을 재확립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복원하시기 위해 2003년 민간 황실복원추진단체인 우리황실사랑회 고문을 역임하셨습니다. 2005년 일시 환국하시어 종묘대제에 참석하셨고 같은 해 5월 10일 홍릉에 찾아온 명성태황후 시해범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와 이에이리 가키치의 손자며느리로부터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기도 하셨습니다.

2006년에는 대한독립투쟁에 적극적이시었던 부왕 의친왕의 항일정신을 재조명하고 이를 재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8월 15일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 묘역에서 거행되는 의친왕제향 초헌관으로 봉무하셨습니다.

<2005년 5월 10일 홍릉에서 명성태황후 시해범 후손들의 사죄를 받으시는 이갑왕자>

덕혜옹주 추모제향 추진

이후 2010년에는 고종광무태황제의 고명딸이시며 고인의 고모가 되시는 덕혜옹주(1912~1989)께서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제향이 끊기자 우리황실사랑회와 뜻있는 시민들과 함께 매년 4월 추모제향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야욕 항의

특히 2005년 3월 16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을 제정하여 반일감정이 확산되고 있던 가운데 주한 일본대사관을 방문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하셨고 과거 일본의 비윤리적인 한반도 침략만행을 강력히 규탄하시고 항의하시어 대한제국황실 황손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 역시 잃지 않으시려 노력하셨습니다.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 일본대사관 항의방문 후 4월 15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방문하시어 한미무역의 가교역할도 개진하셨습니다.>

이렇게 이갑왕자께서는 지난 한 세기 한국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제국 고종광무태황제의 황손으로 의친왕의 왕자로 출생하신 특별한 신분이셨지만 일제강점기 친부이신 의친왕 전하의 항일독립투쟁으로 친일역적매국잔당들에 의해 소외되고 핍박받으신 황족 중의 한분으로서 오히려 일반평민보다도 더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어쩌면 해방 이후 왕정복고파에 의해 대한민국이 영국이나 다른 서방국가들과 같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더라면 대한제국황실의 황손으로서 국민들의 사랑과 추앙(推仰)을 받으시며 고귀한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차별화된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경제적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하셨을 것이라는 단편적인 사고를 뛰어 넘어 배제되고 소외된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에 동참하시어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돌봄의 리더십을 확립하셨을 고매하신 황손으로 기억되셨을 것입니다.

<2005년 이구 황태손 장례식 때 장자 이원 황태자 전하와 함께 빈청에서 문상객을 맞으시는 이갑왕자>

훙서

생존하셨던 의친왕계 및 대한제국황실 후손 중에서 장자(長者)셨고 대한제국황실 제5대 수장이시며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이신 이원(李源) 황태자(황사손) 전하의 생부로 황실의 전통에서 보면 대원군이 되십니다. 2014년 12월 13일 뉴욕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76세로 훙서(薨逝)하셨습니다.